흰 지면은 존재했던 적이 없다

예전에 나는 흰 지면은 존재했던 적이 없다는 글을 읽었다.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은 누구의 추천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이 구절을 적어두었다는 것은 분명히 기억이 나서 옮겨적는다.

흰 지면은 존재했던 적이 없다.
모차르트가 로홀리츠에게 했던 매우 단순한 말은 생각보다 훨씬 더 명확하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 전체를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요컨대 파노라마를 구성하는 것이 문제다. 양팔로, 단 한번에 전체를 통째로 끌어안아야만 한다.
'전체를 한꺼번에' 단번에 기록한다. 전체를 앞지르는 것은 동일한 시간 내에서 그것을 애도함이다. 그것을 영원한 결별 안에서 붙잡아야만 한다.
문의 두 짝을 활짝 열어젖혀야만 한다, 열어젖힌 문짝들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연속해서 잇따르는 페이지들이다. 페이지들은 한 공간으로 열려있고, 기록하는 사람은 그 공간을 보지 못한다. 한 작곡가나 한 작가는 자신이 악보나 글을 적어가는 지면을 결코 보지 못하며, 써내려가는 자신의 기록을 자신의 눈으로는 평생동안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
흰 지면은 결코 존재했던 적이 없다. 흰 지면에 대해서 말하는 교수들과 기자들이 있을 따름이다. 결코 나는 글을 쓰고 있는 내 손을 본 적이 없다.

파스칼 키냐르 <은밀한 생>문학과지성사 2001... 29pp.

행동으로 옮기는 문화가 하루 종일 떠나지 않는다.
나는 글을 쓰는 내 손을 보고 있는가?
흰 지면은 존재하는가?



 사진은 아라키 노부요시.

by 작나무 | 2006/04/10 18:11 | 읽고쓰기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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