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살.

분홍색 더플코트에 하얀 모직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어. 작은 키에 귀엽게 치켜 묶은 저 까만 머리카락은 아마도 풀어내리면 찰랑찰랑대는 생머리겠지. 좋겠다, 스무살. 그 또래의 여자들은 분홍색의 풍선을 제 나이만큼 들고 가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거야.

분홍 풍선 옆에는 그가 있었어. 물론 걔는 나를 못 봤지. 분홍 풍선을 바라보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으니까. 아니, 그 녀석은 원래 날 잘 못봤어. 언젠간 나 죽는다고 개지랄을 떨면서 한밤중에 불러냈는데, 놀라서 달려나온 녀석이 나를 지나쳐서 오십 미터는 더 지나갔었는걸.

아아, 나는 짙은 갈색 가디건 위에 나이들어 보이는 자줏빛 숄을 두르고 있었지. 길어져서 어깨에 닿을려고 하는 컷트머리, 퍼머가 풀려가고 있고, 끝은 다 갈라져서 지저분해.

분홍색 더플코트의 귀에는 투명한 이어폰이 달랑달랑. 무슨 음악을 듣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더군. 이어폰의 다른 한 쪽은 역시나 남자의 귀에 매달려 있고, 분홍색 더플코트는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타입이니까.

그런 남자애들 따위에게 까지 사랑받아야 할 이유는 없는거야. 그렇지. 하지만 나는 엄마가 주선한 소개팅을 한 뒤였다고. 무려 의대생님셨어. 아, 토할 거 같아. 완전 재미없는 이야기를 지껄이다 나왔는데, 빌어먹을 전 남자친구 님이 나보다 다섯살이나 어린 분홍풍선 아가씨를 끼고 지나가는 꼴을 봤단 말야. 너 같으면 어쩌겠니?

섹스하러 갔어. 의대생님도 좀 또라이 같았는데 나도 꽤나 미친년이라, 부모님이 시켜준 선인지 소개팅인지 모를 자리에서 처음 만난 날이었지만, 괜찮아 괜찮아. 물론 그 섹스는 정말 재미없었지만, 안 하는 거 보단 나았을 거라 생각해. 나는 섹스한 뒤에 담배 없으면 씻지도 않고 담배 사러 나가는 여자답게 졸라 담배를 펴댔고, 그 의대생님은 장래 의사선생님 답게 담배의 해악을 설명해줬지. 씨바 의대생이라면서 전문용어라고 남발해 줘야지, 니코틴 타르 폐암 다 아는 거거등. 아, 재수 없어.

나랑 하고 난 뒤에 '와- 키에 비해 발이 크네. 발 큰 여자는 기가 세다던데.' 라고 지껄이더니 '뭐 그래도 작은 여자보단 낫죠.'라고 덧붙여서 씨바 내 발목을 스스로 잘라버릴까 하는 충동이 일게끔 만드는 재주를 부리더라고. 난 차라리 전족을 해서 뒤뚱거리고 돌아다녔으면 좋겠어. 하지만 스물다섯살에 전족 같은 걸 해봤자야. 클만큼 커버렸거든.




by 작나무 | 2006/04/14 21:14 | 손바닥글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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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레비 at 2006/04/14 22:15
의대생은 하여튼. -_-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4/14 22:51
응응. 그럴지도. 근데. 사실은 픽션. 나 의대생이랑 잤던 적 없는 거 같아. 아니. 있나?
Commented by 레비 at 2006/04/14 23:35
아마 없을걸. 보통 의대생은 많이 비호감이잖아.
Commented by 카논 at 2006/04/14 23:41
의대생도 싫고 법대생도 싫어요ㅡ 킁.
글 잘 쓰시네요.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4/16 01:06
카논 님 법대생도 -? 흠. 여튼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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