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또는 오해.

한 여자를 만났다.

그녀도 나를 만나고 싶어 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동갑의 그녀와 함께 있어 술자리가 즐거웠다.
그녀는 인형 같은 얼굴로 조용히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팔과 다리와 몸매가 가늘고 길었다. 찰랑대는 생머리가 부서질 듯 작은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선하게 보이는 눈동자가 때때로 반짝거렸다. 가늘게 내려온 낮은 코와 작은 콧망울이 순해 보였다. 도톰한 입술에 선이 또렷하지 않게 체리 색 립글로즈가 번져있었다.
그녀는 얼굴 가득 미소를 담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주 가끔씩 웃었을 뿐이다. 냉소하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따듯한 인상은 아니었다. 나는 노래방에서 그녀를 위해 밀랍천사를 불렀다. 그녀는 나의 노래를 들으며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그녀는 나의 노래를 듣고 있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나와 동행한 남자는 그녀의 몸에 걸쳐진 브랜드를 읽었다. 그녀는 프라다 구두를 신었고 페라가모 벨트를 하고 있었으며 구찌 가방을 들고 왔다. 구두의 종류나 벨트의 색상이나 가방의 디자인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다. 그것은 그저 프라다의 구두이고 페라가모의 벨트이고 구찌의 가방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 브랜드의 차이를 잘 모른다. 진품인지 정교한 모조품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허술한 모조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직업도 읽어내었다. 아마도 그의 판단은 정확했을 것이다. 그녀와 그녀를 불러 낸 남자-그의 친구가 팔짱을 끼고 사라지고 나서 그가 그녀에 대한 평을 했다.

"업소 애 치고는 참하게 생겼네"

그녀의 조심스러운 말투와 행동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었을까. 웃고 떠드는 술자리에서 혼자만은 취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이유일까. 여자화장실 앞에서 별로 급하지도 않았던 나에게 연거푸 차례를 양보했던 까닭은 그녀를 하루 동안 고용한 남자와 내가 동행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마도.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지만 아마도. 아마도 그럴 것이다.

오해.
나는 그녀가 맥주 한 병을 천천히 마셨던 이유가, 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인 줄 알았다. 그녀가 예의 바르다고 생각한 까닭은 화장실에서 내가 먼저 이용하도록 배려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완벽한 오해.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정말 별로 없었다.
업소 애 치고는 참하게 생겼네. 나는 업소 애답게 생겼다는 게 어떤 뜻인지 잘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참하게 생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보다 훨씬 정확하게 그녀를 보았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업소 애 치고는 참하게 생겼네. 어쩐지 슬퍼졌다.

그는 나의 슬픔을 동정과 유사한 것으로 파악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그 애는 너보다 자기가 잘 나간다고 생각하고 있을 걸."

그렇다. 예쁜 얼굴과 근사한 옷차림, 남자들과 노닥거리고 술을 마시며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어 명품이라 불리는 고가품을 사 모으는 그녀는 분명히 잘 나가는 여자이다. 핸드폰도 꺼 놓고 방구석에 틀어박혀 앉아 친구나 애인을 만나지도 못하고 니코틴과 카페인에 찌들어 끈적한 손을 비벼가며 자판을 두들겨서 돈을 벌어 아무 것도 사 모으지 못하고 기껏해야 싸구려 술이나 퍼마시는 나 따위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그녀는 정말 잘 나가는 여자.

동정 따위는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를 동정할 만큼 강하지 못하고 약하지 않다. 내가 변기에 걸터앉아 머리를 처박고 콧물을 훌쩍거렸던 이유를 그에게 설명한다. 나의 오해 때문이었다고.
허탈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물론 그녀에게 허약한 신뢰 같은 것을 쌓을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던 시간 내내 완벽하게 그녀를 오해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예쁘고 예의바른 차가운 인형 같은 그녀. 그녀는 얼마 정도의 돈을 건네주면 하룻밤의 상대가 되어주는 친절한 여인. 참하게 생긴 업소 아가씨였다.

나의 오해가 슬펐다. 내가 알고 내가 믿고 내가 살아가는 나의 협소한 세상이 슬펐다. 그리고 내가 오해하고 있는 세상과 내가 오해하고 있는 환상을 적어 내려가는 일이 못 견디게 슬펐다. 슬펐지만 여전히 내가 알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에르메스의 팔찌가 끼워진대도 나의 세계는 달라질 것이 없었다. 색색의 에나멜로 코팅된 금속의 고리는 딱 그만큼의 부피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나의 팔에 달랑달랑 걸려있는 작은 팔찌는 그저 그런 것뿐이다. 아아. 그런 것일 뿐이다. 나는 언제까지 오해하게 될 것 같아 슬펐다.



by 작나무 | 2006/04/17 23:39 | 손바닥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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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카논 at 2006/04/18 00:46
작나무 님 글이 좋아요.
새 글이 없나 자꾸 밸리를 들여다보게 되어요.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4/18 14:52
아흥 'ㅂ' 기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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