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한 미혼 여성은 출산과 낙태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간단하고 빠르고 저렴하고 쉬운 반면, 출산을 하기 위해서 몇가지의 요소들을 더 결정해야 한다. 결혼할 것인가, 혼자 아이를 키울 것인가, 아니면 입양시킬 것인가. 크게 보면 결혼, 비혼, 입양, 낙태의 네 가지 중 하나만을 선택하면 되는 일이지만, 대부분의 임신한 미혼 여성은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며 짧지만 스스로에게는 무한하게 긴 고뇌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
시작은 J였다. 그녀는 연애에 있어서는 뭐든 늦었다. 첫키스도 첫섹스도 첫사랑도 우리들 중 가장 늦게 시작했는데 임신은 가장 빨리 했다. 성급하게 준비되어 버린 J의 몸은 서글프게 잉태되었다. 한동안 그녀는 혈색이 좋았고 가슴이 커졌고 조금 예민해졌다. 그런 변화를 그녀는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용기내어 부모에게 고백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붙잡고 울었다. 어찌나 서럽게 울어대었는지, 그녀는 엄마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적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정자를 제공한 남자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아프게했다. 유명한 소설가였던 아버지는 "네가 내 얼굴에 먹칠하고 다니는구나!"라고 호통을 치고 돌아앉아 버렸다. 아버지의 서재 밖으로 나오면서 J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 적 없어요. 내 보지에 먹칠했지."
미술대학 판화과에 재학중이었던 J는 '보지에 먹칠하기'라는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그 작품은 매우 직설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낙태수술을 받은 뒤 피가 흐르는 그곳에 먹을 칠하고 피와 먹이 뒤섞인 얼룩을 찍어내었다. 교수는 C학점을 주었다. J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수업의 절반 이상을 빼먹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노출이 곧 예술이 되는 시기는 끝났어." 하지만 자기노출은 여전히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어서, J는 보지에 먹칠하기 시리즈를 몇 번이나 더 제작했다.
L은 자신에게 임신테스터에 선명하게 두 줄이 그어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전화기를 꺼내 폰뱅킹으로 통장잔고를 확인했다. 그녀가 사귀고 있던 남자는 말하자면 음악인 정확히는 백수였던 놈팽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통장에 수술비용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남자를 만나러 갔다. 남자는 진심으로 애석해했고 자신의 일인 것처럼 슬퍼했다. 하지만 그는 무척 이기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이라, 낳을 수 없으니까 내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할래,라는 치명적인 말을 했다. 무능한 남자는 괜찮아도 무책임한 남자는 참을 수 없었다.
L은 친구 J에게 달려갔고 J는 L의 손을 붙잡고 바로 산부인과에 갔다. 경험자는, 이런 문제에서 생각해볼 시간을 가진다는 게 얼마나 소모적인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마취에서 깨어난 L은 약 십오분동안 J를 원망했고, 이후에는 고맙다고 말한 뒤 다시 그녀의 무심한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고 고백했다. J는 L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 젊고 에이즈나 매독에 걸리지도 않았고 앞으로 아이는 얼마든지 낳을 수 있어."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한숨을 푹푹 쉴 수 밖에 없는 아가씨가 바로 K. 그녀는 임신사실을 알게 되자 곧 다이어리를 꺼내고 핸드폰 통화목록을 뒤지며 지난 한달 동안 그녀와 동침했던 남자들을 손꼽았다. 8명의 남자가 물망에 올랐다. 물론 K는 그 모든 상황에서 콘돔을 사용했었다. 콘돔피임법이 실패할 확률은 0.02%라고 하는데, 그 안에 속한 것이다. K는 일단, 8명에게 전화를 걸었고 6명과 통화했고, 그 누구에게도 임신했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차라리 자신이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라 믿기로 결심했다. 0.02%의 확률을 믿는 것보다는 훨씬 로맨틱한 선택이었다. 로맨틱한 K는 미련을 가지고 고민하는 일주일동안 모짜르트를 들었다. 그녀는 성령으로 잉태한 자신의 아이가 천재일 거라 믿었다.
당시 K를 쫒아다니던 동갑내기 남자애가 있었다. 그는 동침했던 8인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 전의 가임기에는 섹스를 나누었던 사이였다. K는 그와 술을 마시다가, 참다, 참다, 결국, 말해버렸다. 나 임신했어,라고. 남자는 의외로 당황하지 않고 놀라거나 분노하지도 않았다. 그는 도리어 자신이 온 세상의 무거운 하늘을 다 걸머질 수 있는 남자인 것처럼 듬직하게 굴었다. 그래서 K는 그 순간 그와 결혼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K는 또다시, 참다, 참다, 참다, 결국 남자에게 말해버렸다. 우리 결혼할래? 남자는 듬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자. 일단 내가 같이 수술하러 가줄게." K는 미련없이, 성령으로 잉태한 아이를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J에게 전화했다.
M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해내었다. 그녀는 흥분해서, 조금은 기쁨에 들떠서 남자에게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의 질 속에 정액을 채워넣고 나간 적이 있는 남자는 그 정액이 수정시킨 난자를 제거하는 작업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는 유부남이었는데, 이미 아이가 둘이나 있고, 혹이라도 병원에서 누군가를 마주친다면, 그것은 모텔앞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차근차근 자신의 곤란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 담담한 말을 들었을 때, 관계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M은 너무 흥분했다. 흥분한 그녀는 격정적으로 차 문을 열고 차도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유산했다. 그녀가 이런 것을 기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아마도. 또한 실제로 그 남자의 자동차가 M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으나, 그녀는 8주 동안을 병원에서 보내는 동안 소요된 비용을 모두 남자에게 청구했다. 남자는 보험사를 통해 그녀에게 위자료를 지급했고, 그들은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사건을 보고들었던 안정적 커플의 구성원 C양에게도 임신의 위협이 닥쳤다. 그녀는 이후에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들 커플은 2년간의 연애기간 내내 체외사정을 유일한 피임법으로 삼고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체외사정에 실패한 남자는 그녀와 함께 병원에 가서 수술과정과 사후조리를 모두 챙겨주는 등의 의무는 다했다.
C는 임신이 마치 페스트처럼, 돌림병처럼, 차례대로 우리를 덮친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했다. 우리들은 모두 외로워했고 두려워했고 회피하는 한편으로 상상 속에서 조금 행복해한 뒤, 일을 해결하고 아프고 울고 술마시고 토했다. 이런 모든 과정이 우리들 모두를 피해가지 않았다. C의 경우에 확실한 임신의 원인제공자인 남자와 함께 산부인과를 찾았고 그런 이유로 JLKM의 부러움을 샀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말이다.
달팽이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지만 짝을 짓고 수정하고 알을 낳는다. 달팽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해내지만 우리는 하지 못하는 일,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가 만약 달팽이처럼 스스로가 온전히 쉴 수 있는 연약한 껍질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그랬다면 우리는 해낼 수 있었을까?
자기애와 자기혐오는 정비례한다. 우리가 자신을 그렇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변명이다. 상처받지 않으면 아픈줄 모르고 통증이 없으면 인생은 별 것 아니게 되어버린다. 물론 선명한 상처자국은 빛나는 훈장과는 다른 성격의 것이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