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 노래방 도우미 손님 등쌀에 못이겨 자살했다고 한다. 기사에 따르면 21세의 손모씨는 도우미로 일하면서, 건강이 악화되고 손님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가정문제로 괴로워했으며, 결국 지난 20일 오전 7시 10분 빌라 발코니 천장에 목을 매 자살했다고 한다. 비운의 주인공이 '여대생'이라는 점을 강조해주신 광주일보 이승배기자의 센스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이로써 '고교중퇴'나 '40대 과부'와 같은 출신성분의 노래방 도우미의 자살보다 훨씬 주목받는 죽음이 되었다.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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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
미아리 집창촌 불 5명 사망
성매매 여성 5명 참변
군산 윤락가 화재 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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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 읽었던 한 구절이 나의 어설픈 말보다 효과적인 설명이 될 것 같아 옮겨 적는다.
그 논란과 관련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상업적 매매춘' 여성에 대한 경멸도 딱한 것이다. '갈보'나 '똥치'같은 노골적인 경멸과 '요즘 창녀들은 지가 돈 벌고 싶어서 하는 애들이야'하는 우회적인 경멸은 질적으로 다른가? 모든 여성을 깨끗한 여자(성녀)와 더러운 여자(창녀)의 둘로 나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매매춘 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고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누가 제 존엄을 팔아 살겠는가?
- '상업적 매매춘'에 관한 유일한 진실 (2004.09.08 - 김규항, 나는 왜 불온한가, pp.274-275.)
성매매에 대해 어떤 이유로도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구조적인 착취이기 때문이다. 손모씨가 다른 수입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기회를 주었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입장이라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는 것 외에 어떤 대안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입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금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꼴통페미년의 갖잖은 자매애라고 비웃어도 좋다. 몽상가의 비극적인 상상과 자기이입에서 비롯한 슬픔의 과장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어떤 대안도 가지지 못하는 무기력한 생활인의 자조적인 한탄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 죽음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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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얼마나 더 죽어야 하나"
미아리 집창촌 불 5명 사망
성매매 여성 5명 참변
군산 윤락가 화재 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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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에 읽었던 한 구절이 나의 어설픈 말보다 효과적인 설명이 될 것 같아 옮겨 적는다.
그 논란과 관련한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상업적 매매춘' 여성에 대한 경멸도 딱한 것이다. '갈보'나 '똥치'같은 노골적인 경멸과 '요즘 창녀들은 지가 돈 벌고 싶어서 하는 애들이야'하는 우회적인 경멸은 질적으로 다른가? 모든 여성을 깨끗한 여자(성녀)와 더러운 여자(창녀)의 둘로 나누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여전히 매매춘 문제가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이나 윤리의 문제라 생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하고싶지 않은 상대와 섹스하지 않고도 비슷한 돈을 벌 수 있다면 세상에 누가 제 존엄을 팔아 살겠는가?
- '상업적 매매춘'에 관한 유일한 진실 (2004.09.08 - 김규항, 나는 왜 불온한가, pp.274-275.)
성매매에 대해 어떤 이유로도 동의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구조적인 착취이기 때문이다. 손모씨가 다른 수입원을 가질 수 있었다면, 우리 사회가 공정하게 기회를 주었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여성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노골적으로) 팔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입장이라 섹스를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팔아서 살아가는 것 외에 어떤 대안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입장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금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꼴통페미년의 갖잖은 자매애라고 비웃어도 좋다. 몽상가의 비극적인 상상과 자기이입에서 비롯한 슬픔의 과장이라고 비난해도 좋다. 어떤 대안도 가지지 못하는 무기력한 생활인의 자조적인 한탄이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 죽음에 어떤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다는 건, 인간의 존엄성을 외면하는 짓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