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숨겨진 남성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

이 글은 학부때 제출했던 독서감상문이다. 노동문제를 다룬 소설을 읽으면서 여성으로서 느꼈던 어떤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의 불편함에 대해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 다시 읽어보았다.

K선생님을 만났을 때에도 나는 이와 유사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는 충분히 정치적으로 올바른 좌파이며 공동체주의자이지만, 여성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어느정도 낭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점 때문에 페미니스트인 친구는 그를 무척 싫어한다고 밝힌 바 있고, 그런 반응은 분명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비주류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니지만, 비주류로서 주류를 동경하는 삶은 확실히 나쁘다. 무산자로서 유산계급을 동경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제2의 성으로 살면서 제1의 성을 가진 이들과 끊임없이 경쟁하도록 강요받는 일은 고통스럽다. 이중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
성을 파는 여자의 죽음.)  



점(點) - 파블로 네루다

슬픔보다 더 넓은 공간은 없고

피 흘리는 슬픔에 견줄만한 우주는 없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숨겨진 남성중심적 폭력성에 대한 비판

조세희는 1976년 「뫼비우스의 띠」를 시작(『세대』,1976년 2월호;『문학과지성』, 1976년 여름호에 재수록)으로 난장이 연작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1978년 12편의 소설이 한 권의 책으로 묶어 발표되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실험적인 기법과 현실고발적 내용이 어우러진 작품으로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팬지꽃과 같은 낭만적인 상징물이 꿈과 현실을 가로지르거나(“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고 있었다.” 김병익의 해설 「대립적 세계관과 미학」참고), 과감하게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성과 같은 형식적 기법은 이 소설이 대립되는 두 세계(선과 악 또는 자산가와 무산가)를 조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초현실적인 기법은 동화와 같은 느낌을 주는 제목과 함께 군사정권의 독재 하의 표현 제약과 한계를 피해가는 장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의 에필로그 부분에 삽입된 수학교사가 들려주는 일화는 이 책이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해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두 어린이가 굴뚝 청소를 하면 당연히 둘 다 얼굴이 검어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다른 사람에게 노동을 강요하며 그 자신은 하얀 얼굴로 지내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의 병과 같은 과학적 소재도 현실에 대한 은유로 볼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는 2차원 표면이 뒤틀리며 3차원으로 확장된 것이고, 클라인의 병은 3차원 입체가 4차원으로 확장된 것이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밑면과 윗면이 만나기 위해 옆면을 뚫고 들어가지만, 4차원에서는 옆면을 뚫지 않고도 두 면을 붙일 수 있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의 병은 오직 하나의 면의 가지고 있으며, 내부와 외부가 구분되지 않는다. 클라인의 병을 반으로 자르면 뫼비우스의 띠가 두 개 생긴다. 어쨌든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은 근본적으로 차원의 이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없는 -모두가 한 평면 위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 자체가 변해야만 한다.

닭장 속의 닭들이 인공조명 아래서 낮과 밤을 잊으며 알 낳기를 강요당한 것처럼 생산과 경제성장을 위해 혹사당한 노동자들과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나는 가능한 우회하여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 소설을 읽는 가장 적절한 방식은 아니겠지만) 소외된 난장이에 대한 소설 안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소외되었는가의 문제는 고민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차원의 패러다임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모든 작은 점들에 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기존의 부정적 여성관을 답습하고 고착화함으로 계층 허물기의 작전은 이미 실패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여성 인물은 남성중심적 권력유지 목적을 위해 설정된 여성상의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양분하는 부정적 여성관은 먼저 공격의 대상인 자본가 계층 여성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의식 있는 상류층 남성’인 윤호의 시점에서 자행되는 상류층 여성의 성적 타락에 관한 지탄은 3장 우주여행과 6장 궤도회전에 걸쳐 나타난다. 입주 가정교사로 윤호의 사회의식을 일깨워준 지섭이 난장이 집에 나타난 철거반과 싸운 뒤 피를 흘리고 윤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윤호의 (이름도 언급되지 않은) 누나는 지섭을 쫒아내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이 상황에서 윤호는 누나를 “창녀”라고 욕하고 “놈팽이와 붙을 생각만 하는 머리로 뭘 안다고 떠들어.”라고 말하며 분노를 표출했다. 하지만 지섭의 거취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윤호의 누나가 아닌 아버지였다. 윤호의 분노가 정당한 해결책이 되려면 제 아버지를 포함한 집권계층의 남성에게 향했어야 했다. 하지만 윤호는 자신을 네 줄의 철사로 피가 나도록 때릴 권력을 가진 아버지 대신, 놈팽이와 붙을 생각만 하는, 사회의식 없는 누나에게 분노를 쏟아낸다. 그의 가학적인 분노는 (무의미하게도) 여성에게 향한다.

재수생활을 하며 의식이 성장한 윤호가 은강그룹의 손녀딸인 경애에게 행하는 고문 장면은 가학성을 고조시키며 극적으로 전개된다. 윤호는 경애를 고문대에 눕히고, 경애가 옷이 찢겨지며 알몸을 드러낸 것과 같은 수치감을 주었고, 발가벗긴 죄수를 수직 고문대에 묶은 뒤, 그녀의 팔다리를 말뚝에 매어 바퀴를 돌리는 상황을 설정했다. 경애의 죄목은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불쌍한 난장이와 그 아들딸을 팔았다는 것이다. 상류층 십대인 경애가 호의호식하는 동안 또래의 공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며 노동에 시달렸다. 윤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진 너희를 위해 난장이 아저씨의 아들딸과 그의 어린 동료들이 희생을 당해왔어. 지금부터는 그들을 위해 너희가 희생할 차례야. 알겠니? 집에 돌아가면 어른들에게 말해.”

덕분에 의식이 성장한 경애는 (윤호에게만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악한이었는지 토로하는 글을 쓴다. 방종한 상류층 소녀 경애가 현명한 지도자인 윤호를 통해 교화된 것이다. (남성의 능동성과 여성의 수동성을 강조한 남녀관계는 윤호와 은희, 영수와 영이의 관계와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물론 사람과 사람이 만나 서로 어떠한 관계를 맺을 때 한 쪽의 영향력이 다른 쪽보다 훨씬 큰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난장이가 지섭의 책을 빌려서 읽는다든지, 윤호가 지섭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든지 하는 ‘남성과 남성의 관계’와 윤호와 경애의 관계는 분명 다르다. 경애는 무비판적으로 윤호의 주장을 수용한다. 그녀에게는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애착이나 고민이 없다. 그녀는 그저 윤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반복해주는 반영적 매개로서 등장한다. 경애가 제 할아버지를 비판하며 쓴 묘비명에는 그녀가 윤호의 주장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용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화를 쉽게 냈던 무서운 욕심쟁이가 여기 잠들어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죽었다. 평생을 통해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했던 어른이다. 자신은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하고는 했으나 국민 생활의 내실화에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은강그룹에 대한 비판의식을 일깨워준 윤호가 제 아버지를 비판하는 대목은 찾아볼 수 없다. 교화된 경애는 냉혹하게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인 제 할아버지를 비판하고 있지만 교화시킨 윤호는 그러지 못한다.(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성은 친족 살해의 욕망․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존재인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주장이지만 윤호가 스스로의 입으로 친족을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경애는 윤호를 좋아하는 여성으로 (인규나 아버지, 이 사회와는 달리) 윤호가 원하는 대로 쉽게 설득당해 윤호의 주장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부수적 존재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책에 대한 윤호의 고민이 결실을 얻을 것이라 믿기는 어렵다. 경애와 같이 전적으로 남성을 수용하는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여성은 남성의 상상 속에 존재할 뿐이다.

윤호는 타락한 상류층 여성인 제 누나와 경애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이 외에도 타락한 상류층 여성 캐릭터로 2장에서 신애의 뒷집 큰딸(독약을 먹었고 산부인과에 갔다.)과 마지막장에서 은강그룹의 며느리(남편이 죽자마자 다른 남자와 놀아난 사진이 들통나서 경영권을 얻지 못했다.)의 경우가 있다. 성적인 타락을 여성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으로 설정하는 까닭은 대부분의 남성이 그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류층의 타락과 섹스를 결부시키는 방식도 흥미롭다. 윤호와 인규의 섹스의 경우 그 과정을 기술하는 반면 영희나 명희의 경우 동기와 결과를 중요하게 보는 듯하다. 만약 이것이 상류층은 섹스를 즐기고 하류층은 어쩔 수 없이 섹스를 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여성을 창녀와 성녀로 양분하는 까닭은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보다 객체로서 대상화하는 것이 편리하기 때문이다. 윤호의 남성중심적 이분법의 또다른 대상인 은희와 관련된 기술은 이와 같이 대상화된 여성상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윤호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인규가 다른 여자아이들과 접촉하면서 은희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는 천연색 슬라이드를 보면서도 은희를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윤호는 악마 같은 인규에게 시험 답안지를 보여줌으로 은희를 보호했다. 은희는 윤호의 자기희생적 기사도 사랑의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 그녀는 “재수 동아리에서 제일 맑고 깨끗했던 아이”로서 윤호의 사랑을 받는 한편으로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준다. “은희는 권총을 든 채 외투의 단추를 풀었다. 그리고, 그 안 원피스의 지퍼를 내렸다. 권총을 책상 위에 놓고 팔을 내리자 알몸이 되었다. 그녀는 어머니처럼 다가가 눈물로 범벅이 된 윤호의 얼굴을 가슴과 두 팔로 감싸안았다.” (윤호의 어머니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윤호가 모성적 대상으로 은희를 갈구하는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은희는 윤호가 사랑할만한 가치가 있는 여성이었고(성적으로 타락하지 않았다), 윤호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주었으며, 윤호의 가치를 인정해주었고,(“그해 여름 윤호는 은희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은희만은 윤호를 이해했다. 은희는 윤호가 노동 운동가, 또는 사회 운동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은희는 윤호를 단순한 삼수생으로는 결코 보지 않았다.”) 윤호의 주장을 수용하여 그를 지지하였다.(“윤호가 난장이의 아들딸 이야기를 할 때 은희는 귀기울여 듣기만 했었다.  윤호가 은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은희도 검은 기계가 가득차 있는 은강을 생각했다. 윤호가 은희에게 영향을 주었다. 은희도 검은 기계가 가득차 있는 은강을 생각했다.”) 윤호의 자아는 은희를 통해 성장한다.(“은희를 안고 있는 윤호의 머릿속에 까만 기계들이 들어차있는 은강시가 떠올랐다. 단체를 만들자. 그 사람 혼자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야. 그날 호텔을 나서면서 윤호는 생각했다.”) 은희는 윤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은희라는 존재의 의미는 윤호의 결핍된 모성을 충족시켜주고, 윤호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내게 도와주는 가장 이상적인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을 뿐이다. 성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에도 여성의 수동성은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상류층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류층 여성들의 경우에서도 여성들의 수동성 강조와 성적 타락을 찾아볼 수 있다.

“그 명희가 자라면서 다방 종업원이 되고, 고속버스 안내양이 되고, 골프장 캐디가 되었다. 그애가 어느 날 핼쑥해진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그애로서는 마지막 인사였다. 어머니는 명희가 집에 올 때마다 배가 불러 있었다고 나중에 말했다.”

결국 명희는 19만원을 남기고 자살을 택한다. 문제는 성적 타락이 여성에게 최악의 상황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명희가 그냥 핼쑥한 얼굴로 돌아오는 것 보다 임신한 채로 돌아오는 것이 보다 비극적이다. ‘가난해서 타락한 여성의 자살’은 극적인 효과를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을 보는 시선은 상류층 여성을 보는 시선보다 따듯하고 동정적이다. 하지만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을 가장 비극적인 상황으로 취급다는 점에서 남성중심적 순결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은 다를 바 없다.

(물론 정상적인 여성 캐릭터도 존재한다. 신애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지만 학생운동과 농촌운동을 경험했고 현 사회에 대한 불만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 창녀와 성녀 중 어느 쪽으로도 구분되지 않다. 기혼여성이며 어머니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혹자는 노동문제를 주제로 하는 소설에서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작가에게 무리한 요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하급계층에 속하는 노동자들의 인권과 삶을 향상시키고자하는 노력이 기존의 남성중심적 체계를 고착화하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문제는 노동자들이 ‘생존비’ 이상의 임금을 받고 정해진 시간의 노동을 한다는 식의 처우 개선의 문제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구조의 문제이다. 영수의 노트에 적힌 말은 이 문제를 대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일깨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여성을 가학적 분노 표출의 대상, 무비판적 수용자, 응원하고 지지하고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제2의 성’으로 취급하는 태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다. 여성에 대해 억압적인 태도를 기본으로 노동자의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 소설은 기존의 부정적 여성관을 답습하고 고착화함으로써 계층 허물기의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로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앞에서 제기한 여성문제는 이 소설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문제로 풀어가야 할 것이다. 노동문제를 주제로 한 소설을 굳이 페미니즘적 시각으로 읽어본 까닭은 그 대상이 노동자이든 여성이든 모든 억압과 폭력의 원리는 유사하다는 점에서 시작하였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의 은유가 말하듯이 다른 차원의 이동, 즉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만, 모두가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없는 한 평면 위에서 동등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전체를 보기 전에 우리는 가장 작은 존재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117cm, 32kg의 난장이는 우주만큼 소중하기 때문이다.
by 작나무 | 2006/06/03 23:41 | 읽고쓰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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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레비 at 2006/06/06 03:05
이런글이었구나. 좋앙.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6/06 09:58
ㅇㅇ; 부끄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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