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귀여니를 비롯한 인터넷 소설의 출판, 과연 적절한가? 란 주제로 벌어진 공개토론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 소설에 대해서 잘 모른다. 하지만 인터넷 소설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어렵고 무겁고 비싼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막연한 경외심을 가지는 한편으로 쉽고 가볍고 값싼 글을 쓰는 사람에게 민감하게 반발하는 경향이 있는 듯. 잘 알지 못하거나 잘 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려는 것은 상당히 원초적인 심리. 이런 부분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귀여니에 대한 비판에 비판을 가할 마음 따위는 없고, 다만 귀여니를 비판하는 사람의 근거가 어떤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써본다.
1. 문법 - 인터넷 소설이 국어의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다.
사실은 1.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국문법의 파괴(변화)가 시작되었고, 2.인터넷 소설은 파괴(변화)된 국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소설이 국문법을 파괴한다는 말은 어불성설.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이 국문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환경이 변하면 언어도 변한다. 언어가 변하기 때문에 사회환경이 변화한다.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식의 인과관계는 따질 필요 없을테고, 어쨌든 우리 말은 변화하고 있다. 무수한 신조어가 등장하고 새로운 표현법이 발견되고 있으며 신조어의 주기는 더 짧아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에 뒤떨어져서 인터넷 세대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곤란한 상황이라면, 배워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국어파괴 운운하며 시대를 통탄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떤 개인의 노력으로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뭐 이런 변화와 무관하게 사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도 "~읍니다" 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2. 매체: 인터넷 소설의 오프라인 출판은 부적절하다?
어떤 텍스트를 컴퓨터를 통해 읽는 것과 인쇄매체를 통해 읽는 것은 분명 다르다.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한 글 읽기는 빠르고 간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소모된다. 이 차이는 어떤 음악을 mp3 플레이어로 듣는 것과 LP로 듣는 것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빠르고 간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소모된다는 매체의 특징을 근거로, 그 매체의 가치를 낮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오래된 방식의) 느리고 간편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매체의 가치우위를 인정하는 경향의 반대급부 말이다.
가치우위에서 가치하위로의 이동은 인정하는 반면 가치하위에 있는 매체에서 가치우위의 매체로의 이동은 일종의 '신분상승'으로 보며 고깝게 생각하는 듯. 그러니까 사람들이 '쉽고 가볍고 값싼(소설 동호회 게시판에 무료로 제공되었던)' 인터넷 소설이 '어렵고(권위를 가지고 있고) 무겁고(무언가 의미있어 보이고) 비싼(크든적든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진짜 책 으로 출판되는 일에 반발하는 것이다.
반례로 오프라인으로 출판된 책의 텍스트를 그대로 전자책으로 출판하는 경우에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지극히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저작권 문제, 복제방지 시스템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을 뿐, 오프라인 출판물의 온라인 출판, 과연 적절한가? 따위의 문제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다른 예로, 소설의 영화화와 영화의 소설화를 들 수 있을 듯.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는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매체 변화가 과연 적절한가?라는 문제제기는 드물다. (영화가 낫더라 소설이 낫더라 하는 이야기는 작품의 완성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반대로 영화의 소설화는 논란이 되었는데, 영화 외출을 원작으로 소설화한 김형경의 작품은 정통문학과 대중문화의 결합 또는 야합이라고 이야기된 바 있다. 이런 예에서도 보듯, 전통적인 매체->신매체는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그 역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입닥치라고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실제로 출판에 관계된 일을 하지도 않고 출판시장의 주요한 구매자도 아닌 이들이 진짜로 불편해하는 것은 '매체의 적합성'이 아니라 '매체가 가진 권력'의 문제에 가깝다는 점은 분명하다.
3. 홍보 및 판매: 귀여니의 상업성에 관해?
그렇다. 인터넷소설은 지극히 상업적이다. 그렇다면 상업성이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되묻겠다. 귀여니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을 싸잡아서 비판한다.
우리사회의 배금주의(拜金主義)와 배금주의(排金主義)는 영원한 평행선인듯. 부자의 사치스런 삶을 동경하는 한편으로 부자의 사치스런 삶을 비판하는 논조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나는 귀여니의 글에 대해 "그런 (쉽고 가볍고 값싼) 글은 나도 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내 주위에는 현재 글쓰기에 재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함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귀여니보다 훨씬) 좋은 글을 써낼 것이라 믿는 이들이 꽤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써라."고 대꾸한다. 귀여니가 판매한 부수의 1/10이라도 소비되는 글을 써낸다면 출판사 소개해줄게! 인세 20%로! 내가 매니저 해줄게!
판매량이 문학성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판매량은 동시대의 공감지수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터넷 소설의 최대 지지자는 누구인가? 익히 알다시피 십대들이다.
4. 주제 : 소녀적 감성의 과잉상태?
특정한 표현법이 특정한 주제를 대표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문열의 글은 이문열의 논조가 담기기에 가장 적합한 문장이고, 박민규의 문체에는 박민규의 감성이 가장 잘 담겨있다. 이는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문열의 표현은 그를 지지하는 특정계층의 주제에 가장 적합하고, 박민규의 표현은 그에 공감하는 특정계층에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문열을 지지하는 계층에 속해있다면 박민규의 글은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박민규에게 강하게 공감하는 계층에게 이문열의 글은 수구보수꼴통 아저씨의 뻔한 말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귀여니는?
귀여니의 작품을 지지하는 십대들이 보기에 이문열의 글은 지루할 뿐이고 박민규의 글은 짜증날 뿐일 것이다. 물론 예로 든 이문열과 박민규가 동등한 권력을 가진 표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귀여니도 역시 그렇다. 이문열>박민규>귀여니 순이 적절할 것인데, 이는 그 작가를 지지하는 계층의 권력 순서이기도 하다. 귀여니의 지지계층인 십대의 권력이란 참으로 미약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귀여니 재미있어요." "귀여니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것이니 말이다.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아직 충분한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이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도록 하자.
하지만 함부로 말 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십대-여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은 귀여니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는데, 한국의 십대여성문화가 소녀적 감상이라든지 연애환상의 과잉이라는 식으로 가치절하될 이유는 없다. 기성세대는 그들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취향과 판단의 문제
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가 "보르헤스의 글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장황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서 뒷부분만 듣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부끄러워서 대상을 가치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월드컵 경기를 보며, 조재진 저 새끼 빼, 이운재 오늘 왜 이렇게 둔해,와 같은 말을 내뱉는 아저씨들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설령 자신이 조기축구회에서 십오분정도 뛰고 나면 엠뷸런스에 실려갈 게 분명할지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자기 맘대로의 품평을 할 자격은 있다. 하지만 그런 근거없는 주장이 공론화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귀여니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얼마든지 "문법파괴"나 "상업성", "소녀적 감성" 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작품이 가지는 문화사적, 문학사적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포스트모던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후에 우리가 21세기 초반의 인터넷 문화와 인터넷 문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그런 사람들은 어렵고 무겁고 비싼 글을 쓰는 사람에게 막연한 경외심을 가지는 한편으로 쉽고 가볍고 값싼 글을 쓰는 사람에게 민감하게 반발하는 경향이 있는 듯. 잘 알지 못하거나 잘 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려는 것은 상당히 원초적인 심리. 이런 부분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귀여니에 대한 비판에 비판을 가할 마음 따위는 없고, 다만 귀여니를 비판하는 사람의 근거가 어떤 것인지 곰곰히 생각해볼 필요를 느끼기 때문에 써본다.
1. 문법 - 인터넷 소설이 국어의 문법을 파괴한다?
아니다.
사실은 1.인터넷을 사용하면서 국문법의 파괴(변화)가 시작되었고, 2.인터넷 소설은 파괴(변화)된 국문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 소설이 국문법을 파괴한다는 말은 어불성설.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이 국문법을 파괴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환경이 변하면 언어도 변한다. 언어가 변하기 때문에 사회환경이 변화한다. 닭이 먼저 달걀이 먼저 식의 인과관계는 따질 필요 없을테고, 어쨌든 우리 말은 변화하고 있다. 무수한 신조어가 등장하고 새로운 표현법이 발견되고 있으며 신조어의 주기는 더 짧아지고 있다. 변화의 속도에 뒤떨어져서 인터넷 세대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곤란한 상황이라면, 배워야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국어파괴 운운하며 시대를 통탄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 어떤 개인의 노력으로도 이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뭐 이런 변화와 무관하게 사는 것도 좋을지도 모른다. 요즘에도 "~읍니다" 라고 쓰는 사람들이 있으니 말이다.
2. 매체: 인터넷 소설의 오프라인 출판은 부적절하다?
어떤 텍스트를 컴퓨터를 통해 읽는 것과 인쇄매체를 통해 읽는 것은 분명 다르다.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한 글 읽기는 빠르고 간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소모된다. 이 차이는 어떤 음악을 mp3 플레이어로 듣는 것과 LP로 듣는 것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들은 빠르고 간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이 소모된다는 매체의 특징을 근거로, 그 매체의 가치를 낮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전통적인, 오래된 방식의) 느리고 간편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매체의 가치우위를 인정하는 경향의 반대급부 말이다.
가치우위에서 가치하위로의 이동은 인정하는 반면 가치하위에 있는 매체에서 가치우위의 매체로의 이동은 일종의 '신분상승'으로 보며 고깝게 생각하는 듯. 그러니까 사람들이 '쉽고 가볍고 값싼(소설 동호회 게시판에 무료로 제공되었던)' 인터넷 소설이 '어렵고(권위를 가지고 있고) 무겁고(무언가 의미있어 보이고) 비싼(크든적든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진짜 책 으로 출판되는 일에 반발하는 것이다.
반례로 오프라인으로 출판된 책의 텍스트를 그대로 전자책으로 출판하는 경우에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지극히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저작권 문제, 복제방지 시스템의 문제 등에 대해 논의했을 뿐, 오프라인 출판물의 온라인 출판, 과연 적절한가? 따위의 문제제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또다른 예로, 소설의 영화화와 영화의 소설화를 들 수 있을 듯. 소설을 원작으로 영화는 수많은 사례가 있지만, 매체 변화가 과연 적절한가?라는 문제제기는 드물다. (영화가 낫더라 소설이 낫더라 하는 이야기는 작품의 완성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반대로 영화의 소설화는 논란이 되었는데, 영화 외출을 원작으로 소설화한 김형경의 작품은 정통문학과 대중문화의 결합 또는 야합이라고 이야기된 바 있다. 이런 예에서도 보듯, 전통적인 매체->신매체는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그 역은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입닥치라고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어쨌든 실제로 출판에 관계된 일을 하지도 않고 출판시장의 주요한 구매자도 아닌 이들이 진짜로 불편해하는 것은 '매체의 적합성'이 아니라 '매체가 가진 권력'의 문제에 가깝다는 점은 분명하다.
3. 홍보 및 판매: 귀여니의 상업성에 관해?
그렇다. 인터넷소설은 지극히 상업적이다. 그렇다면 상업성이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를 되묻겠다. 귀여니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대중성을 싸잡아서 비판한다.
우리사회의 배금주의(拜金主義)와 배금주의(排金主義)는 영원한 평행선인듯. 부자의 사치스런 삶을 동경하는 한편으로 부자의 사치스런 삶을 비판하는 논조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는 계속될 것이다.
나는 귀여니의 글에 대해 "그런 (쉽고 가볍고 값싼) 글은 나도 쓴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봤다. 내 주위에는 현재 글쓰기에 재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함에도, 언젠가는 자신이 (귀여니보다 훨씬) 좋은 글을 써낼 것이라 믿는 이들이 꽤 있는데, 나는 그들에게 "그렇다면 써라."고 대꾸한다. 귀여니가 판매한 부수의 1/10이라도 소비되는 글을 써낸다면 출판사 소개해줄게! 인세 20%로! 내가 매니저 해줄게!
판매량이 문학성을 입증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판매량은 동시대의 공감지수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터넷 소설의 최대 지지자는 누구인가? 익히 알다시피 십대들이다.
4. 주제 : 소녀적 감성의 과잉상태?
특정한 표현법이 특정한 주제를 대표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문열의 글은 이문열의 논조가 담기기에 가장 적합한 문장이고, 박민규의 문체에는 박민규의 감성이 가장 잘 담겨있다. 이는 작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문열의 표현은 그를 지지하는 특정계층의 주제에 가장 적합하고, 박민규의 표현은 그에 공감하는 특정계층에게 가장 적합할 것이다. 이문열을 지지하는 계층에 속해있다면 박민규의 글은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박민규에게 강하게 공감하는 계층에게 이문열의 글은 수구보수꼴통 아저씨의 뻔한 말씀일 것이다. 그렇다면 귀여니는?
귀여니의 작품을 지지하는 십대들이 보기에 이문열의 글은 지루할 뿐이고 박민규의 글은 짜증날 뿐일 것이다. 물론 예로 든 이문열과 박민규가 동등한 권력을 가진 표상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귀여니도 역시 그렇다. 이문열>박민규>귀여니 순이 적절할 것인데, 이는 그 작가를 지지하는 계층의 권력 순서이기도 하다. 귀여니의 지지계층인 십대의 권력이란 참으로 미약하다. 이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귀여니 재미있어요." "귀여니 욕하지 마세요." 정도의 것이니 말이다. 이 주제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이들이 아직 충분한 권력을 획득하지 못했으므로, 이에 대한 평가는 보류하도록 하자.
하지만 함부로 말 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십대-여성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인 시선은 귀여니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는데, 한국의 십대여성문화가 소녀적 감상이라든지 연애환상의 과잉이라는 식으로 가치절하될 이유는 없다. 기성세대는 그들의 문화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5. 취향과 판단의 문제
나는 보르헤스의 소설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가 "보르헤스의 글은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장황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서 뒷부분만 듣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사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 부끄러워서 대상을 가치절하하는 경우가 많다.
월드컵 경기를 보며, 조재진 저 새끼 빼, 이운재 오늘 왜 이렇게 둔해,와 같은 말을 내뱉는 아저씨들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설령 자신이 조기축구회에서 십오분정도 뛰고 나면 엠뷸런스에 실려갈 게 분명할지라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축구를 잘 하는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자기 맘대로의 품평을 할 자격은 있다. 하지만 그런 근거없는 주장이 공론화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귀여니의 글을 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얼마든지 "문법파괴"나 "상업성", "소녀적 감성" 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들이 뭐라고 떠들든 작품이 가지는 문화사적, 문학사적 의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어찌되든 상관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이 포스트모던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후에 우리가 21세기 초반의 인터넷 문화와 인터넷 문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게 될지 무척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