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 인명사전 -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

넌 그 살인의 당사자야. 네 양어머니가 네게 가한 비유적인 살해 시도, 뒤이어 네가 시도한 자살 기도 같은 건 논외로 하자. 다른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욕구를 넌 지금까지 도대체 어떻게 억누를 수 있었니?
- 아멜리 노통브, 로베르 인명사전, p.174

성장은 살인이다. 플렉트뤼드는 태내에서 이미 살인을 시작했다. 그의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살해한 자는 뤼세트가 아니라 플렉트뤼드였다. 그 점에 관해서는 뤼세트가 여러 번 반복해서 증언한다.

"어째서 남편을 죽였습니까?"
"뱃속에서 아기가 딸꾹질을 했어요."

플렉트뤼드는 어머니마저 살해한다. 그녀에게 독특한 이름을 남긴 어머니 뤼세트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어째서? 아마도 아기의 '발레리나의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음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이후 플렉트뤼드는 자신을 죽이려고 시도한다. 어린 시절 눈을 맞으며 설관에 스스로를 묻으려 하기도 하고 후일 다리 위에 오르기도 한다. 부모를 살해하고, 그들의 결과물인 자신을 살해함이 성장함의 최종 목표인 것이다. 이유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죽기 위해 살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부모를 살해하지는 않는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살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부모살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들은 성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질주라는 점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성장할 수 없다.

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살인을 한다. 부정하지 않으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 대한 부정은 자아에 대한 부정이며, 이는 자아를 부정하고 있는 자신을 직시하는 타인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아멜리를 죽임으로 플렉트뤼드는 살았다. 마티외와 머리를 마주하고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고민한다. 아멜리는 죽었다. 플렉트뤼드는 살았다. 로베르 인명사전에는 플렉트뤼드가 죽인 자의 이름이 적혀있다.

-- 아멜리 노통브는 유행이 지났어. 라고 말해버리기 쉬울 듯. 솔직히 나도 2004년 복학한 뒤로는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여튼 당시에 쓴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 들춰보았다. 어쨌든 다시 보니 실망스럽다. 성장은 살인이다! 따위의 과격한 말을 퍽퍽 해댔다는 점에서 개인적으로만 의미있는 글.
 
이 글을 뒤척이며 다시 노통브의 책을 읽었는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가 보기엔 역시 잘 쓴 소설이다. 심리묘사에 있어서는 탁월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데, 개인적으로는 여성주의 소설 또는 여성적 글쓰기란 이런 모습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런 이야기꾼 언니랑 사귄다면 십년 정도는 군소리 않고 청소며 빨래며 해줄 수 있어. 크루아상이나 파이 반죽하는 것도 배울게요. 잇힝~)
 
다작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두 다 읽으려면 진이 빠지기 마련인데, 2004년 봄 이전에 한국어로 출판된 노통브의 책을 모두 읽은 독자로서, 혹이라도 이 글을 읽고 노통브의 책을 읽고싶다는 충동이 일어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 중 베스트3를 꼽아본다면,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 로베르 인명사전, 오후 네시. 유년기-성장기-노년기 순서의 배열이긴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이 세 권을 추린 것은 아님.
 
Nothomb - 노통,이 아니라 노통브,라고 읽는 게 맞다는 이야기 해준 사람이 누구였지? 불어는 제대로 발음하기가 너무 힘들어. 인명이라 사전에도 안 나오고 말이지. b 묵음인가 아닌가?
by 작나무 | 2006/06/25 22:57 | 읽고쓰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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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핏빛고양이 at 2006/06/26 11:34
노통, 아냐? 오후 네시 한 권 읽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최근 책을 읽는 건 어려워. 너무 자극적이야.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6/26 18:33
응. 내가 본 책 표지엔 노통으로 되어있는데 불어하는 애가 노통브라고 알려줬던 거 같아서.
아멜리 노통 자극적이라는 점은 인정. 근데 되게 근질근질하고 므흣한 자극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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