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설정.

F.

그 자동차 우리나라에서 처음 봤다. 명품양복을 입으면 사람이 정말 나아 보이는구나 생각했다. 압구정동에서 포장마차 처음 가봤다. 포장마차에서도 발렛파킹 해준다는 거 몰랐다. 소주랑 청하 마셨는데 술값 존나 비쌌다. 내가 사주께요 라고 말했는데 그 사람이 무시한 점 감사하다. 대리운전 불러서 우리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한번 거절했는데 다시 제안해주는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줘서 두번째로 감사하다. 차안에서 뽀뽀했다. 이 시간에 대리운전 하면서 별 꼴 다볼 기사님을 이유로 키스와 애무는 거절했다. 거절하다 결국 수락했다.

빨간 스포츠카는 어릴 때부터의 로망이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는데 그가 말했다. 어렸을 적에는 돈이 없으니까 타고 싶어도 못 탔는데 나이 먹으면 쪽팔려서 못탄다고 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성공은 돈이야. 우리나라에 연수입이 억대인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될 거 같아. 인구 오천만이라고 치고 계산해봐. 나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왜 미대를 갔는지 알아. 수학이 너무 싫어서였어.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면 관계설정이 중요해. 그냥 아는 동생인지, 호감은 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는 상대인지, 아니면... 네가 쉬워보인다는 말은 아니야. 나는 이렇게 답했다. 응. 쉬운 여자가 아니거든. 그는 낮게 한숨을 쉬고 다시 말했다. 섹스보다는 그냥 안아주는 것도 좋아.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너는 어떤 관계를 원하니.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관계는 따듯할수록 좋아. 라고. 하지만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미리 설정하지 마. 관계는 만나다보면 결정되는 거야.

그는 나에게 빨갱이라고 했다. 방탕한 좌파 여성이라면 어떤 상대를 꼬시고 싶을까? 카리스마있는 혁명의 지도자일까 아니면 좌파운동에 반대하는 무지한 늙은이일까? 어떤 것을 원하느냐와 어느 쪽이 더 올바르냐는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한 올바른 것을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빨갱이가 아니기 때문에 혁명의 지도자나 혁명의 반대자 둘 다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나는 이 남자, 빨간 스포츠카를 가지고 있고 많은 돈을 벌고 명품으로 치장하고 있는 그리고 관계설정으로 관계를 시작하려고 하는 이 남자를 수락할 것인가 그러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어쨌든 나는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새벽에 전화가 한 번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잘자, 라는 짧은 문자였다.
by 작나무 | 2006/06/28 09:46 | 일상잡설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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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레비 at 2006/06/28 17:13
남자는 뒷태.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6/28 18:42
그래서 사각팬티는 에러.
Commented by 핏빛고양이 at 2006/07/05 12:47
돈 많은 남자는 내 순수한 꼴림을 헷갈리게 만들어. 그 남자가 사는 술과 편안한 차와 비싼 값을 하는 모텔 혹은 (심지어) 호텔방이 전화거는 손을 민망하게 만들어.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7/05 14:03
글쎄. 허술한 자취방과 싸구려 술과 가난과 비루함 때문에 전화거는 손을 망설인 적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부끄러울 이유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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