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대(東京大)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47책이 서울대학교로 인수되었고 이를 26일부터 일반에 공개한다고 한다.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의 가치에 대해서 내가 한마디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실록이 돌아와 기쁜 마음에 대해서는 두마디 세마디쯤 더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소식을 뒤늦게 접하고 아침부터 들떠서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았다. 개화기에 약탈당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는 당연히 자국으로 환수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가 병인양요 당시 약탈해간 외규장각 고서를 보자. 이 소중한 문화재의 반환은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이를 위해 여러 단체와 개인이 힘을 모으고 있다. 약탈문화재반환운동범제천시민위원회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탈한 문화재의 반환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입장이다. 국제교류나 무역도 활발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열강이 설치던 시절 이후로 늘 약소국의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에도 외국으로부터 약탈한 소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 싶다.
> 실크로드 약탈기.
중국 서쪽, 지금은 황폐한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에서 최첨단 문명이 교류하던시절이 있었다. 서역상인의 낙타떼가 사치품과 실용품과 정신적 보물을 싣고 오가던 그 실크로드 지역에는 아직도 못다 발굴한 유적과 유물이 숨겨져 있다.
20세기 초, 이 인류 문명의 보고에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등의 '탐험가'들은 이 사막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실크로드의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들은 학자도 아니었고 순수한 의미의 탐험가도 아니었으며 다만 보물사냥꾼에 불과했다. 이들이 뜯어내간 석굴의 벽화와 귀중한 고문서와 보물은 2차대전 당시 상당수 파괴되었다. (특히 독일 베를린 지역으로 옮겨진 유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에는 이들의 약탈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홉커크의 표현대로 이들은 진정, 악마들이었다.
1910년대에 이 지역을 다녀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도 무수히 많은 유적을 도굴해갔다. 승려였던 오타니(大谷)는 가장 수준높은 불교 유적을 도굴하는 데 성공했고, 이들이 약탈해 온 수천점의 유물 중 일부는 1914년 경성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에도 우리나라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소장된 유품 중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가 도굴해온 것으로 그 수량은 1천5백점의 규모라고 한다.
> 우리의 선택은?
물론 이 유물은 우리나라가 직접 약탈해온 것은 아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는 매우 좋은 수집경로라 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약탈의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으며 반환의 의무도 회피할 수 있고, 그 값진 유물을 자국의 것으로 소장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논리에 따르면, 오타니 콜렉션 역시 중국 정부로 반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정부에서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장물이며, 이 보물은 그것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 콜렉션은 돌려주기 너무 아까운 보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민병훈 학예연구관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서역의 석굴사원에는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독일이 수집한 벽화는 2차 세계대전 때 재로 변했다. 또 서역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후 이교도들이 석굴에서 생활하면서 벽화의 눈을 많이 훼손해, 그만큼 희귀한 유물이다."
결자해지란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참으로 어려운 덕목인 듯 싶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돌아왔기에 너무나 기쁜 마음이지만 즐거운 한편으로 우리가 무단으로 소유하고 있는 남의 소중한 문화재가 생각나 한꼭지 쓴다.
.... 조금 더 다듬어서 써먹어볼 생각. + 아스타나 석굴의 약탈 흔적 사진 검색.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품 이미지 검색.
+ 베트남전. 우리의 침략전쟁. 라이따이한을 찾아주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있으나 어려운듯. 침략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 피해자였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천 년의 역사 동안 아무리 많은 유태인이 학살당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레바논 침공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남로당 사무총장 너부리 님의 말을 빌려오고 싶다. "전쟁 좀 하지 마라 변태들아"http://www.namrodang.com/issue/issue_01.asp?idx=90
하지만 약탈한 문화재의 반환에 대해서는 우리도 그리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입장이다. 국제교류나 무역도 활발하지 않았으며 제국주의 열강이 설치던 시절 이후로 늘 약소국의 위치에 있는 우리나라에도 외국으로부터 약탈한 소작품이 있다는 사실은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 싶다.
> 실크로드 약탈기.
중국 서쪽, 지금은 황폐한 타클라마칸 사막지역에서 최첨단 문명이 교류하던시절이 있었다. 서역상인의 낙타떼가 사치품과 실용품과 정신적 보물을 싣고 오가던 그 실크로드 지역에는 아직도 못다 발굴한 유적과 유물이 숨겨져 있다.
20세기 초, 이 인류 문명의 보고에 제국주의의 탐욕스러운 손길이 닿기 시작했다.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 등의 '탐험가'들은 이 사막을 헤매고 돌아다니며 실크로드의 유물을 약탈해갔다. 이들은 학자도 아니었고 순수한 의미의 탐험가도 아니었으며 다만 보물사냥꾼에 불과했다. 이들이 뜯어내간 석굴의 벽화와 귀중한 고문서와 보물은 2차대전 당시 상당수 파괴되었다. (특히 독일 베를린 지역으로 옮겨진 유물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에는 이들의 약탈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홉커크의 표현대로 이들은 진정, 악마들이었다.
1910년대에 이 지역을 다녀간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도 무수히 많은 유적을 도굴해갔다. 승려였던 오타니(大谷)는 가장 수준높은 불교 유적을 도굴하는 데 성공했고, 이들이 약탈해 온 수천점의 유물 중 일부는 1914년 경성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일본이 물러난 뒤에도 우리나라 서울에 남아있었는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실에 소장된 유품 중 대부분은 오타니 탐험대가 도굴해온 것으로 그 수량은 1천5백점의 규모라고 한다.
> 우리의 선택은?
물론 이 유물은 우리나라가 직접 약탈해온 것은 아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는 매우 좋은 수집경로라 할 수 있다. 우리 정부는 약탈의 책임도 지지 않을 수 있으며 반환의 의무도 회피할 수 있고, 그 값진 유물을 자국의 것으로 소장할 수 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 외규장각 도서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는 논리에 따르면, 오타니 콜렉션 역시 중국 정부로 반환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중국정부에서 강력하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것은 일종의 장물이며, 이 보물은 그것이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 콜렉션은 돌려주기 너무 아까운 보물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민병훈 학예연구관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서역의 석굴사원에는 벽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고, 독일이 수집한 벽화는 2차 세계대전 때 재로 변했다. 또 서역에 이슬람교가 전래된 후 이교도들이 석굴에서 생활하면서 벽화의 눈을 많이 훼손해, 그만큼 희귀한 유물이다."
결자해지란 스스로에게 적용하기 참으로 어려운 덕목인 듯 싶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가 돌아왔기에 너무나 기쁜 마음이지만 즐거운 한편으로 우리가 무단으로 소유하고 있는 남의 소중한 문화재가 생각나 한꼭지 쓴다.
.... 조금 더 다듬어서 써먹어볼 생각. + 아스타나 석굴의 약탈 흔적 사진 검색.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명품 이미지 검색.
+ 베트남전. 우리의 침략전쟁. 라이따이한을 찾아주기 위한 개인의 노력이 있으나 어려운듯. 침략과 전쟁의 역사 속에서 피해자였던 적이 더 많았다고 해서 우리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천 년의 역사 동안 아무리 많은 유태인이 학살당했을지라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레바논 침공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남로당 사무총장 너부리 님의 말을 빌려오고 싶다. "전쟁 좀 하지 마라 변태들아"http://www.namrodang.com/issue/issue_01.asp?idx=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