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2004.10.21 01:23

그를 만나서 도서관에서 발견한 재미난 책을 꺼내보며 조잘조잘 떠들어대고 치킨을 먹고 맥주를 마시고 꼬치구이를 먹고 소주를 마시고 걸어나와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단지 안에 있는 작은 놀이터엔 지나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럭키.
시소를 탔다. 꼭 이정도의, 균형을 맞추지 않으면 곤란해. 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이너리티에 관해 생각했다. 계속. 슬퍼지면서, 노숙자들 생각이 났고, 내 생각이 났다. 여튼. 숨을 헐떡일만큼 열심히 시소를 탔다. 발을 구르고 무게를 뒤로 옮기고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균형을 맞추는 건 한 사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나란히. 나란히 그네를 탔다. 그네는 나란히. 같은 속도로 바람을 가르지는 못해도 같은 곳을 바라볼순 있지. 쇠사슬이 덜그락 끼걱 삐익 우우우. 음험한 소리가 들려도 무섭지 않아. 그러다 발랑. 모래에 넘어져버렸고 그가 일으켜줬고 포근한 모래바닥에 주저앉아서 낄낄대며 놀다가 미끄럼틀에도 기어올라갔다. 내려오는 방향에서 두두두 뛰어올라가는 짓도 했다. 사실 어릴땐 그러는 애들이 싫었다. 해보니 재미났다. 그는 내가 뛸 때 발을 높이 든다고 말했다. 내가 뛰는 일은 일년에 몇 번 없으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식으로 말하는 건, 누군가가 미술관은 일년에 몇 번 가지도 않으니까 그림 따위 뭐라도 상관없어, 라고 말한 거랑 비슷하다. 그래서 걸음걸이와 뛰는 모양을 교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끄럼틀 계단의 꼭대기에서 그가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그는 사르르 눈을 감았다. 우리는 젖소와 염소와 사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관이 향기로운 녀석을 곁에 두고 볼 수 있다면 근사할 것 같다. 모짜렐라 치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 담배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갑자기 우유를 먹고 싶어졌다. 오늘 낮에도 하나 먹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집어들었다. 맛은 언제나 실망이지만 우유속의 딸기과즙,이란 이름은 정말 좋다. 딸기우유보다 신선한 기분이 되어버린다. 팩에 그려진 그림도 예쁘다. 역시 맛은 여느 딸기우유와 다를 게 없지만. 빨대로 쪽쪽 소리를 내면서 빨아먹고 담배를 피우고 또 이야기를 했다. 지금 내가 안정을 찾고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에서 당신의 역할이 매우 컸다,고 감사의 말을 하고 싶었는데, 잘 말하지 못했고 어쩌면 정확히 이런 말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루가 더욱 모호해졌다. 어쩌면 영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치킨집과 꼬치구이 집이 어디었는지 너무 생생해. 우리동네에 술집이라곤 달랑 그렇게 뿐이니까, 그네를 타면서 생각했던 것들 여전하고, 놀이터에서 술에 개 취해서 뒹굴었던 것도 매우 납득할만하고, 여전히 나는 우유속의딸기과즙을 종종 먹고, 담배는 없으면 바로 사러가고, 그래. 그래, 다 그대로인데 지금은 그가 옆에 없고 추억만 남아 있다는 차이가 있지. B는 일기를 쓰면 과거에 함몰해 버린다고 말했는데.... 글써. 기억할만한 과거는 여전히 좋아. 그 때 나는 정말 행복했던 것 같아. 오늘 고양이와 술을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지. 우리 곁을 떠나간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by 작나무 | 2006/08/12 02:09 | 손바닥글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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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핏빛고양이 at 2006/08/12 18:36
중요한건 그는 다시 돌아올거라는거야. 그는 결코 완전히 사라질수 있는 사람이 못되는걸, 나는 알아.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6/08/12 19:50
완전히 사라지는 사람은 없어. 그 사람은 특히 그렇지만. 뭐. 아니라도. 괜찮아. 기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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