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의 역사 1. 풍속과 사회> 에두아르트 푹스, 이기웅, 박종만, 까치
- 책에서 다루는 풍속의 범위는 성 모랄-결혼제도와 성에 대한 관점과 태도, 그리고 이와 연관지어 볼 수 있는 복식이나 예의범절과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다.
- '풍속'이라는 하부구조를 통해 각 시대와 계층의 사회-경제적인 필요 또는 목적이라는 상부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 헤겔철학의 세계관과 맑시즘('계급의식'과 '계급투쟁' 부분 주의해서 읽을 것.)과 유물론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 하지만 헤겔의 한계를 직시할 것. -유럽사를 인류사와 동일시하는 한계- 실제로 지금까지 읽은 모든 사례는 서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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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랄의 기원과 본질
1)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그 토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오늘날의 모든 문명의 토대는 사유재산제이다." 사유재산제는 성모랄 분야에서도 그 토대의 형태를 결정하며 형성하고 이 토대의 형태가 바로 일부일처제이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과는 무관하다. "개인적인 성적 사랑을 일부일처제의 토대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제도로서의 일부일처제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을 한 사람(남성)이 독점하고 이를 자손에게 상속시키기 위한 목적의 결혼제도이다. "아내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오직 정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잉태된 자식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인은 일부일처제를 남녀의 화해의 결과라든가 결혼의 최고의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 그 이전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남녀의 투쟁의 선언"이라고 했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이 아닌 인습 위에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 위에 세워진 것이다. 경제적인 조건은 오직 남성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고 그러므로 일부일처제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다." "결혼 생활에서 남자는 지배계급의 위치에 있고 여자는 피압박계급 및 피착취계급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남자만이 입법자였다. 이 입법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비는 항상 지어미의 순결을 엄격아헤 요구하고 지어미의 부정에 대해서는 최대의 범죄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는 언제나 미온적이고 원시적인 제한만을 두어 의연한 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모두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사물 자체의 필연성, 즉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자연의 복수"가 나타났는데 간통과 매춘이 그것이다. "간통과 매춘은 피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이며 지어미의 정부, 오쟁이진 지아비, 매춘부는 어느 시대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2) 성 모랄의 여러 가지 변화
시대와 계층에 따라 결혼의 다양한 형태와 결혼생활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부과되었던 도덕률 그리고 매춘과 매춘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
# 결혼의 여러가지 형태와 아내 상<--결혼 문제 언급하면서 참고할 것-->
"연애결혼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시대와 계급이 있는 반면 연애와 결혼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어 아주 타산적인 처지에서 노골적으로 "자식을 낳는 암말"로서 아내를 취했던 시대와 계급도 있었다. 아내는 가축이자 노동하는 동물이었으며 평생 동안 속박된 가내 노예로서 자신의 의지란 전혀 없는 오직 참고 견디는 분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시대에는 아내는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형 혹은 응석부리는 사치품이거나, 자신의 선배인 남편의 첩들이 남편을 즐겁게 하여 남편을 사로잡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노력을 침실에서 남편에게 바치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여기는 향락물 혹은 세련된 향락 도구로까지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두 사람의 동지, 즉 같이 손을 잡고 인생의 험한 비탈길을 기어올라 자신들의 높은 이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믿을 만한 동지라고 생각한 시대나 계급도 있었다."
"처녀가 애완물로 교육이 되는가 아니면 필수품으로 교육이 되는가<--또는 남성의 동지가 되는 한 인간으로 교육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의해서 결정된다."
성 모랄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이런 사례들은 성 모랄의 하부구조와 연결되어있다. 하부구조인 언어,복장,수치심,교육,예술,법률 등을 통해서 성모랄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시대와 계층(경제적 계층과 젠더계층)에 따라 풍속(언행과 태도, 복장 등)은 다르며,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요컨대 사회도덕의 전체적인 차이는 시대와는 관계없는 우연의 소치가 아니며,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제멋대로 배제해버릴 수 있는 우연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차이 속에서 일반 사회생활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과 그 저류의 필연적인 결과를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모순된 여러 현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주 정연한 질서가 있다. 거기에는 무의식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혼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전사회적으로 관철되는 경향 가운데서 언제나 그리고 도처에서 하나의 엄격한 법칙이 그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헤겔적인) '엄격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어떠한 사회도덕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그러한 사회도덕이 어디에서 그렇게 강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는가, 그러한 영구한 변화와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요인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 모랄의 모든 상수 중에서 끊임없이 현상을 변화시키는 필연적인 변수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변혁의 법칙
변천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각 시대의 '도덕의 표준'을 각 시대의 사회생활과 결부시켜 조사하는 데서 시작하겠다. "역사와 연관관계가 없는 대중현상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사고방식은 생산관계를 축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 발전단계의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사유제산제, 즉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성 모랄의 모든 토대를 결정하고 또 싫든 좋든 끊임없이 성 모랄의 하부구조를 결정한다."
성욕 자체는 경제적인 동력이 아닐지라도 성욕의 배출구는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
"성욕-대중현상으로 간주되고 인정되는 모든 성욕-이 남녀를 일찍 결혼하도록 하는가 늦게 결혼 하도록 하는가, 결혼의 대용품으로 첩을 두는가 매춘부를 찾는가, 상류의 유한마담을 구하는가 타락한 타이피스트를 구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처녀가 결혼하여 주부가 되는가 어머니가 되는가 귀부인이 되는가, 처녀를 고르는 기준이 애를 잘 낳을 수 있는 체격이 되는가 아니면 아름다움이 되는가, 처녀가 애완물로 교육이 되는가 아니면 필수품으로 교육이 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의해서 결정된다. 부부의 순결이 가장 중요한가 아니면 성생활의 자극적인 향락이 가장 중요한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또한 모든 성행동의 하부구조인 복장이나 예절 등도 경제적인 토대와 결부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항상 "정신과 물질 가운데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이다." <--눼눼, 독일철학자시군요.-->
# 성 모랄과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연관관계에 대한 실례.
a) 독일의 일부이처제
17세기중반 독일 뉘렌베르크 지방에서는 30년 전쟁으로 인구(특히 남성인구)가 줄어들자 남성이 2명의 여성을 부양하는 결혼제도를 권장했다.
"30년간전쟁전에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700만을 헤아렸는데 전쟁이 끝난후인 1648년의 총인구는 실로 400만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400만의 인구 중에서도 남자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남자의 수는 여자 2.5명에 대하여 1.5명의 비율이었다. 이것은 전재의 비참한 결과였다.
자식의 생산,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경제적 요구였고 따라서 그것이 생식능력이 있는 모든 남자의 가장 고귀한 도덕적인 의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의 근본적인 도덕관과 모순된 것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정부가 나서서 남자는 모두 이 방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무조건 이 의무를 이행할 것을 공개적으로 엄명했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징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증거는 분명히 있다. 이 시애의 얼마되지 않는 공문서 속에서 우리는 이 증거를 명확히 찾아볼 수 있다. 1650년 2월 14일 뉘렌베르크 지방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피비린내나는 30년전쟁 시기에 전쟁과 전염병과 기아 때문에 잃어버린 군사를 다시 보충하고...하는 것을 요구한다. 금후 10년간 모든 남자는 두 사람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만약 당시까지의 도덕을 뒤집어 엎는 경제적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이 공인된 목표가 위와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나타났을 리가 없다."
b) 농촌지역의 아내 돌림빵
"여기에 보쿰(Bockum)국법 중의 한 기록을 원문 그대로 소개해보겠다.
더구나 진실한 아내를 두고 있는 남편은 그의 아내의 여자로서의 권릴르 충분히 거두어줄 수 없을 때에는 아내를 이웃사람에게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웃사람이 그녀를 충분히 도와줄 수 없을 경우에는 그는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보듬고 고통을 주지 말고, 자식을 줄 수 있는 아홉 남자에게 차례로 데리고 가서 부드럽게 내려 놓고 고통을 주지말고 5시간 동안 거기에 둔 다음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해야한다. 그래도 그 여자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이웃사람은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껴안을 다음 천천히 내려놓고 고통을 주지 말고 그 여자에게 새옷과 여비가 든 돈지갑을 주어 대목장으로 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도울 수가 없을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만이 그 여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오늘날의 말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건강하지만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가진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대를 이을 아이를 잉태하게 해줄 가능성이 있는 남자의 침대에 자신의 아내를 보내야 하며 그 사람의 힘으로도 애를 갖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2, 제3의 이웃사람에게도 시험해 보아야 하고 모두 실패할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가 아내를 돕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애를 낳는 것은 확실히 여자의 의무였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를 낳는 분만도구가 되는 것은 모든 여성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농촌지역에서의 사고방식과 성 모랄은 농촌경제(농촌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있다. 농민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은 자식이다. 자식은 가장 값싸게 오랜 시간동안 노동력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혈통보다는 자식이라는 자본을 얻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경우 개인적인 애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적 남자의 생식능력이 중요했으며 이 때문에 아내는 자식을 낳은 동물로 취급되었고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에는 오늘을 이 남자에게로 내일을 저 남자에게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에는 버림받을 수밖에;;-->
# 계급(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성모랄의 차이: 16 세기 수공업 마스터들과 상인들의 예.
같은 시대에도 계급 간의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성 모랄의 차이가 보인다. "16세기의 수공업 마스터들과 상인들간의 결혼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수공업 마스터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정의 충실한 고문이었고 집안을 정돈하고 부엌이나 술창고를 돌보는 엄격하면서도 정숙한 주부였지만 돈 많은 상인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주부이자 관능적인 향락에만 이용되는 시녀였다.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두 계급의 전혀 다른 경제적인 틀 속에 뿌리를 둔다."
수공업 마스터의 경제적인 위치에 적합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 계층의 아내들은 검소하고 부지런한 주부로서의 생활양식을 요구받았다.
반면 돈 많은 상인들의 아내는 재산으로 인해 노동에서 해방되고 남편에 의해 사치품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사치품이 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해방의 단초였다. 우선 첫째로는 점점 더 늘어가는 재산 덕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치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치품이 되어감으로써 주부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당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칙이 아내에게 적용되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생활을 장식하고 남편의 쾌락의 횟수를 증가시키는 최상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상인의 아내로서의 임무는 아내에게 전혀 다른 생활형태를 강요했고 따라서 전혀 다른 도덕을 강요했다. 수공업 마스터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었던 남편에 대한 향락봉사가 상인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전면에 나서게 되어 그것이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아내는 최상을 사치품이었고 최상의 향락도구였다. 아내는 매일 향락을 준비하고 그것을 신선하게 해야만 했다. 아내가 오랜 기간 그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면 해낼수록 그만큼 아내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사치의 정도는 분명히 재산의 크기를 과시한다. 이것은 자본이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내는 가장 사랑 받는 사치품으로서 이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아내들에게는 인생이 영원한 축제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것은 남아도는 재산으로부터 저절로 생겨난 논리였고 또 요구였다. ... 그것은 정말로 축제 속의 인생 그것이었다. 아내에게 재산이나 노고, 쓰레기 등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은 모두 아내의 주변으로부터 추방되어버렸다. ... 이러한 것 속에는 인생의 가장 신성한 임무인 어머니로서의 임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아내에게서 사교를 빼앗고 축제기분을 오랜 기간 동안 깨뜨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육체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애를 낳는 것은 젊은 아내를 늙게 만들고 또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유방은 남자를 유혹하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결혼의 목적으로서의 모성이라는 하늘이 준 임무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서 결국은 불가피한 불행이라는 의미로까지 격하되어버렸다."<--여성과 모성에 대한 동시대의 문제와 관점에서도 적용가능한가?-->
이 계층에서는 간통도 사회적으로 위험한 행위가 아니었으며 도리어 사교적인 덕성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문화적 발전이 그 노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미개시대에는 난폭한 싸움이 유희의 규칙이었지만 바로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이때의 그 규칙은 공상의 탕음난무(Orgie)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플러트(flirt)로 바뀌어버렸다..."
이와 같이 16세기라는 동시대에도 수공업 마스터와 돈 많은 상인들의 성 모럴에는 차이가 있으며 각기 다른 계층의 아내들은 그 계급이 요구하는 특별한 예의범적을 준수해야 했다. 각 계급의 특수한 예의범절이나 도덕돤은 특수한 계급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도덕의 차이는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로 발전되기도 하며, 이런 흐름은 '계급차별에 대한 강한 충동'과 '계급연대에 대한 강한 충돌'에 의해 강화된다.
# 계급도덕이 다르게 발전하는 이유
a) 계급차별
계급도덕이 각기 다르게 발전한 까닭은 각 계급의 경제적인 상황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인데, 한 계급에 속한 개인은 그 도덕률에 전적으로 구속되었다. "귀족노파가 쭈글쭈글한 유방을 드러내놓아 보는 사람들을 소름끼치게 하거나 구역질나게 하더라도 이 노파는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시민계급의 여자가 코르셋의 보물을 과시하여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도 그것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되었다."
또한 계급도덕이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이유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권력 차이 때문이다. "소시민수공업자가 16 세기에 들어와 점점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그 시대의 욕탕생활이 인간생활에서 맡았던 훌륭한 역할대로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얼굴을 맞대고 그 결과 목욕탕이 주제넘은 귀족이나 도시귀족의 지배에 대한 반항의 중심지로 변하게 되자 항상 자신들의 지배권을 내세워 협박하던 지배계급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욕탕을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장소라고 선언했고 권력이 흔들릴 경우에는 즉시 목욕탕을 폐쇄해버렸다. 바로 이것이 매독에 이어서 16 세기에 욕탕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한 제2의 원인이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도덕을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하곤 했지만,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피지배계급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농업노동자나 공장노동자의 남녀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항상 어쩔 수 없이 육체를 맞부딪칠 경우나 부모나 어린이들, 동숙하는 청년이나 처녀, 성년자나 미성년자가 좁은 침실에서 뒤섞여 잠을 잠으로써 어른들의 성생활이 매일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현장교육을 제공하게 되었지만 이 경우 지배계급은 수세기 이래로 한번도 그것이 풍기를 문란하게 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내부에서만은 남녀가 몸을 밀착시키지 않도록 강제하였지만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태가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개선시켜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도 또한 도리에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가 자신들의 지배이익과 경제적 이익에 적합했고 따라서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사회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b) 계급연대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관은 그 계급의 사회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른 계급과의 차별은 그 계급 내에서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그것은 공동의 제복이나 견장과도 같은 것이며 또한 하나의 슬로건 아래 모인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슬로건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된다."
# 젠더에 따라 다른 성 모랄이 적용된 이유 - 권력과 계급의 차이.
위와 같은 이유로, 남성에게 성적인 자유와 문란함을 허용하는 반면 여성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젠더에 따른 권력차 때문이다. <--계급차별의 세가지 요소는 정확하게 적용되지만 계급연대는 적용하기 어려울 듯 싶다.-->
"이 경우 동일한 사회의 인간이라는 것을 동일한 계급에 속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배의 결과를 평범한 실례로써 설명하기 위해 유산계급의 비합법적인 연애관계에 대한 규정을 여기에 소개해보겠다. 귀족계급이나 시민계급의 청년이 숨겨놓은 여자가 있으면서도 이 다방 저 다방에서 많은 중매인들의 주선으로 부자나 귀족의 딸과 선을 보더라도 이 청년은 그 계급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다. ... 그리고 버린 여자의 후임자로 집에 들어 앉히려고 하는 "행복한 새색시"가 자신과 결혼하기 이전 수년 동안 이 지아비가 이 여자 저 여자와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은 물론 많은 창녀와 관계하고 거기에다가 유부녀를 차례로 유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 그 남편이 뻔뻔스럽게 신부의 육체의 순결을 기대하더라도 또는 신부가 신랑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는 최초의 성교에서 신부가 처녀라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 다른 남자가 이전에 아내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 즉 아내에게 "과거"가 있다는 것을 결혼 후에 남편이 알았을 경우, 이와 동일한 계급도덕은 남편에게 그러한 아내는 부정한 아내로서 지체없이 쫓아내더라도 괜찮다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처녀가 어떤 남자로부터 유혹을 받아 임신을 했을 경우에도 그 남자는 그 처녀를 버려도 괜찮았다. 자신들의 계급도덕의 관점에서는 남자는 그 상대가 사생아를 낳고 자신이 그 아이의 정당한 부친이더라도 그 처녀와 어떻게든 결혼해야만 한다는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결론: 성 모랄의 공식
시대, 민족, 특정 계급에 따른 다양한 성 모랄을 공식으로 정리하면,
"첫째, 사회의 모든 질서는 그 사회현상 그 자체를 도덕률로써 제시하던가 아니면 사회를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서 사회의 성립조건을 강화하고 또는 완전히 지키는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공식화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그 특수한 삶의 이해관계에 대립하는
것, 사회의 토대로서의 제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며 부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각각의 미세한 것에까지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결코 동질의 단일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서로 모순된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계급이익에
따라서 모든 도덕규칙을 다양하게 변경하거나 개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기초한 사고방식으로 나타난 것은 모두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반
하는 것은 모조리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이러한 인식을 하나의 정의로 종합해보면 도덕이란 결국 각각의 특수한 계급이익
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모든 삶의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현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상의 것은 실로 법칙 그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제 우리들은 도덕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이나 의회에 의해서, 예컨대 루
터나 루소, 칸트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군주나 도덕이라는 가면을 쓴 장로회, 제국의회에 의
해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이라든가 비
밀의회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라는 형태로 과장하여 공
표 하던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비준할 뿐이다. 그러므로 "루터 이래로", "루소
이래로", "칸트 이래로", "어떠어떠한 결의 이래로"라고 말하는 경우 세상사람들이 그 인물
이 공표한 것이나 의회가 비준한 것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인 경향의 출현 또는 시작을 발견
하는 한 그 견해는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결코 원인은 아니
다."
<--즉, 도덕률은 사회적인 경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표면적인 모순이 있을지라도 일반적인 도덕률과 예의범절(관습)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도덕률은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즉 "모든 계급의 이익을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의 원칙이 있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덕의 표준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류이다."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률은 계급연대나 계급차별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계급지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따라서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로서 항상 휘둘러지는 수단이다. 각 시대의 지배계급은 여타의 계급을 향해 자신들의 특수한 지배이익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라고 강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지배계급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이러한 것들의 표준을 제시했다. ... 지배계급은 다른 계급들을 육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신적으로도 지배한다는 것, 따라서 지배계급은 모든 정신분야에서도 다른 계급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견을 강요한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예를 들면 어떤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많이 가지는 것이 미풍양속으로 간주되고 영원불변의 고귀한 도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풍양속은 어떤 시대에는-그것도 그것이 널리 권장되던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항상-노동력이나 병사, 납세자 등을 필요로 하는 지배계급에게만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익이 되었다. 물론 지배계급 자신들만은 아이들이 많아야 한다는 규칙에 별로 속박되지 않아도 좋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에 있어서만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무례한 요구라는 식으로 뻔뻔스럽게 그것을 거부했다."<--동시대에도 적용가능할듯-->
# 성 모랄의 규칙이 성차별적인 이유
성 모랄의 규칙이 왜 남자와 여자에게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는가? 도 경제적인 원인-사유제산제-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제산제를 토대로 일부일처제가 출현했으며 "역사에 있어서 계급차별의 최초의 형태"인 남녀계급차별이 나타난다. <--이에 관해서는 책 서두에서 설명했음: 사유재산의 적자상속을 위한 남성중심적 체제 확립--> 남녀의 불평등을 남녀 모두가 자연의 질서로 간주하고 사물의 당연한 상태로 간주해왔으며,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자"가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고 있는, 즉 계급으로서의 "여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여자들은 19세기 말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계급의식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로 성 모랄의 남녀권리 차이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었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비판에 반발하여 지금까지의 상태를 사물의 "자연스러운" 그리고 따라서 "영원불변의" 제도로 보는 남자가 많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건은 바로 남자의 계급지배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즉 남자의 계급지배가 지금도 그 근저에서부터 뒤집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는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발전해가며 또 경제조직이 변화해감에 따라 계급이익과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계급구성도 변화해가기 때문에 각 시대는 다른 도덕률을 받아들이고 다른 도덕의 표준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성 모랄의 규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덕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성 모랄 변혁의 속도와 사회안정
<-- 현대사회의 성모랄이 급변하는 이유는?--> 사회 토대의 변혁이 근본적이고 혁명적일수록 공적인 도덕률의 변혁도 근본적이다. 생산관계의 변화 속도가 느린 과거에는 도덕률도 오랜 기간동안 동일했고 "풍기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5세기,18세기,19세기에서처럼 완전히 새로운 경제원칙이 등장한 시기에는 일체의 도덕률도 송두리째 변혁되었다. 또한 군주의 "씨받이 남자"와 같이 사회도덕의 표준에서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런 개인적인 요구는 개인적인 사정이 사라지면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 도덕의 정반합<--조낸 헤겔주의자+유물론자-->
"도덕은 스스로가 시대의 커다란 경제적인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동안에만, 즉 도덕이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동안에만 사회를 비옥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덕이 그러한 힘을 잃어버리고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익에 배치된다면 그 도덕은 더 이상 사회를 개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꾸어 말하면 앞에서 역설한대로 경제,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률을 요구하는 생산의 발전에 어울리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드디어 사회발전의 지렛대 역할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이 모순된 상태는 역사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어 마침내 변화된 삶의 내용이 거대한 모순에 부딪히면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립은 혁명기
에 달할 때까지 계속 역사 위에서 유지된다. 이 혁명기야말로 모든 시대에서 낡고 생명력이 없는 도덕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완전히 새로운 도덕이 탄생하는 시기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점진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의 필연성이 현실 속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법률상의 비준을 요구하는 시기이다. 이 혁명기를 계기로 하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가르쳐주는 모습이다. 나의 견해는 사회에서의 이상적인 도덕의 힘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힘을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는 것일 뿐이다."
# 도덕과 계급의 관계
<--지배계급의 도덕 강제와 이중성의 모순-->
특정 계급의 지배체제가 유지되면서 지배계급은 그들의 도덕관을 다른 계급에게 강요하는데, "특정한 도덕관을 방어하는 것이 계급지배에는 매우 중요한 지배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안정적이 된 경제적 방법을 대표하고 있는") 보수계급은 (경제적으로) 변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수정을 거절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것은 결국 다른 계급을 위한 것이며 이론적으로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수계급도 개인적으로는 변화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역사발전에서 생긴 거의 대부분의 수확의 달콤한 즙을 빨아먹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마침내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는 역사의 상황여하에 따라 어떤 때는 위선적으로 또 어떤 때는 노골적인 철면피로 변하는 이중의 토대를 가진 유명한 도덕이 발행한다. 위선의 경우에 해당되는 고전적이 실례는 19세기 영국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점잔빼는 신사숙녀들의 유형을 공공도덕의 모범으로까지 치켜세웠다."
국가와 사회에서 권력이 독점적인가 덜 독점적인가에 따라서 지배계급의 태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에 해당하는 두 가지 예를 비교해보면, "18세기의 프랑스에서와 같이 19세기 영국에서도 불로소득으로 얻은 거대한 부가 결국 이 육욕적인 방탕의 토대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 부는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얼버무린 위선이라는 외피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사회의 토대는 가장 발달된 근대적 입헌정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중의 감시와 비판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는 그 토대가 영국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토대는 극단적인 절대주의였기 때문에 일체의 진보적인 감시나 공개적인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한편 부르조아 계급은 겨우 그 맹아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은폐를 위한 외피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적 덕성을 닥치는 대로 짓밟아버렸던 특수이익, 점점 새롭고도 파격적인 향락생활만을 추구하려고 했던 특수이익은 대중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설쳐댔고 스스럼없는 뻔뻔스러움도 제멋이었다."
<--도덕과 계급의식, 그리고 계급투쟁-->
특수한 계급도덕은 "계급연대"의 중요한 수단으로 계급 내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계급도덕은 새로운 계급의 탄생과 함께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계급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특수한 이익을 깨달아 마침내는 스스로의 특수한 요구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계급의식"에 눈뜨게 되며 "일반적인 도덕의 표준"과 "계급도덕"이 구별된다.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이 발전하면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새롭게 탄생한 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게 되면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해 의식적인 대립을 시작하며 그들의 특수한 이익을 주장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으려고 투쟁을 시작한다.
그래서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도덕의 향상의 원인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 발돋움하는 계급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는 한 그들의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도덕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의 도덕까지도 훌륭하게 향상시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계급동료들의 도덕수준을 한층 높은 단계로 향상시키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신흥계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또 지배하는 계급이 대표하는 지배의 정당성을 부도덕한 것으로-물론 이것은 성 모랄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 일반도 포함된다-의식하고 이러한 시각에서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요구는 정의라고 주장한다."
"신흥계급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의 지배를 부도덕한 지배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정의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행위에서까지도 진정한 도덕을 대표하려고 한다. 그 결과 신흥계급은 자신들로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청렴결백이야말로 최고의 조건이라고 모두에게 시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은 신흥계급에 의해 향상되어왔다. 실례로 "근대 부르주아의 해방시대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17세기의 영국과 18세기의 프랑스, 19세기의 독일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사멸해 가는 봉건제도와 싸웠던 시민계급이 매우 높은 도덕성을 대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신흥계급이 성 분야에서도 예컨대 금욕을 신봉하고 자유분방한 연애의 모든 형태를 엄금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 해방시대에서는 분명히 결혼과 가족에 대해 근엄한 의견을 선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 가운데는 한층 향상된 도덕성이 일부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흥계급이 사회에서 한층 향상된 도덕을 대표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유, 즉 자신의 진영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 즉 신흥계급에서는 항상 어떤 사회적 요구를 극히 대담하게 선언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도덕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언제나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반영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의 재구성의 중심이 된 계급은 성행동에 있어서도 그 시대의 최고의 발전단계로서의 도덕의 필연적인 가장 진보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흥계급은 소위 고급 빵가루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계급보다-더 영리함과 동시에- 더 도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논리가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즉 역사적인 논리에 최후의 결정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이유가 하나가 되어 신흥계급의 특수한 도덕을,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회의 전체 도덕의 진보를 위한 지렛대로 만들었다."
4) 미래의 전망->부터 읽을 것
3. 색의 시대-역사와 본질
앙시앙 레짐, 즉 프랑스 대혁명 이전 절대주의 왕정 하의 쾌락주의 사회는 소수의 집권계층이 다른 계층을 착취하여 누린 것. "인류 전체로 볼 때, 인간은 오늘날까지 아직 한 번도 지상의 파라다이스, 곧 낙원 따위를 산책한 적이 없으며 낙원에서 추방된 일도 없고 낙원을 잃어버린 적도 없다. 낙원의 문은 아직도 인류에게는 닫혀져 있다."
"만약 우리가 문명의 비극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면, 신들의 황혼은 인류에게는 어떻게 해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류의 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자랑스러운 확신을 모토로 내걸어야 한다. 그에 반해서 절대주의 시대는 인류가 이를 악물지 않으면 안되었던 가장 비참한 비극의 시대였다."
1) 중앙집권의 발달
"존재현상은 항상 행동으로 시작된다. 역사에서 그 행동은 곧 혁명이다. 이것은 세계사의 모든 계급운동에도 적용된다. 계급운동이 역사에 등장할 때는 항상 혁명적이다. 그것은 역사의 낡은 조직을 무덤으로 보내고 모든 것이 변혁된 내용에 걸맞는 정치형태를 지배적 위치에 앉히는 혁명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것이 역사에서의 혁명적인 것의 본질과 작용이다. 계급운동이 처음에는 혁명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것이 마지막에 화석화해서 유기적으로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대신에 그 지배가 시작되는 날로부터 유기적인 모든 발전에서 가로막는 최대의 제동장치로 바뀌더라도 이 논리는 언제나 진실이다."
절대주의 왕권도 혁명적으로 시작한 것, 신대륙 발견과 해외무역<--이라고 하지만..사실은 착취잖아. 어쩔수없는 유럽인 -_-;-->으로 상업이 발전하면서 상인들의 이익이 자치도시를 넘어 민족국가로 확대되며 이들의 이익을 보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치제도가 강력한 절대군주의 중앙집권체계로 요구되었다.
# 절대주의의 형성과정
"어느 나라도 절대주의라는 정치적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 자본주의단계로 바로 건너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a) 스페인
"이러한 역사의 필연성은 가장 빨리 스페인에서 나타나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유럽의 어떤 지역보다도 앞서 뚜렷한 절대주의적인 문화가 생겼다. 스페인의 풍속과 에티켓이 맨 먼저 유럽의 궁정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b) 프랑스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스페인의 그것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100년이나 뒤의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의 지배와 중앙집권의 안정은 이미 1615년, 곧 루이 13세가 즉위한 해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세계 무대에서 세계 제패에 실패한 스페인의 쇠사슬을 끊은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지배권을 공인 받게 되었다."
c) 독일
"독일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30년 전쟁(1618-1648)의 비참한 결과의 하나였다. 30 년 전쟁에서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원조를 받은 독일의 제후와 자유도시(Reichsstadt)가 요구하는 자주독립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주장하는 구교를 기초로 했던 독일제국 사상을 이겼던 것이다. 그 결과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 의해 모든 제후들, 모든 자유도시들-이른바 신성 로마제국 직속의 자유도시들-은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좋았고 또 멋대로 다른 제후나 왕국과 동맹해도 괜찮게 되었다. 그 동맹은 형식적으로는-그러나 그 형식은 무시되었다-황제나 제국을 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30년 전쟁의 독일의 비극은 그 조약의 결과로 확실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구화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30년 전쟁 속에서 비참한 독일의 소국가분립주의를 대표하는 "초라한 굴뚝새의 둥지를 제거하고" 독일국민을 위한 신성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합스부르크가의 교황적인 세계제패의 최후의 시도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일을 부흥으로 이끌고 자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시도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은 그렇게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독일의 소국가 분립주의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역시 그 소국가들의 비참한 경제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30년 전쟁이 끝나자 동시에 합스부르크가, 곧 스페인 절대주의가 프랑스를 상대로 자웅을 겨눈 세계제패전에서도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프랑스의 화폐는 독일에서 큰손을 흔들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 100년도 더 넘게 독일의 수백의 크고 작은 궁정의 텅 빈 돈주머니는 프랑스의 뇌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선 제후의 궁정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 프루츠가 갖가지 문서들에 의해서 증명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곧 왕자, 왕세자, 모든 대신들로부터 가장 급이 낮은 시종에 이르기까지-이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대신에 현금 대가를 간단히 받아들였다. 현금이 너무나 노골적인 느낌이 들 경우는 훌륭한 말, 값비싼 의상, 호화로운 은제식기 세트, 그것들에 필적하는 탐나는 물품들을 받았다. 공공연하게 선언된 영구적인 부패가 30년 전쟁의 유산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100년 동안 외국의 이권을 보장하는 노리개가 되었고 독일의 적은 보호의 미명하에서 독일 제후들의 영구적인 매국행위에 마수를 뻗쳤다."
"독재적인 절대군주제를 향한 역사적 발전은 독일에서도 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장애물에 의해서는 막을 수 없는 것이 자명했다. 다만 독일은 한 사람의 군주 대신에 200명의 절대군주를 받들게 되었다. 독일국민은 200이나 되는 궁정의 탐욕스런 일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 절대주의를 지속시킨 역사의 법칙
절대주의 시대의 특징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국가권력이 행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절대군주도 "사회적 왕권"에 관한 사명을 느낀 일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특수 이익밖에는 몰랐다. 만약 군주가 민족국가의 제도적 발전을 꾀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본가의 돈주머니를 능란하게 털기 위해서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도였을 뿐이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보호는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즉 절대주의는 일반적으로 경제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층계급의 민중은 봉건주의의 비참한 착취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는 착취의 화신으로까지 보인다." (카우츠키, <1789년 이전의 계급대립>)"
절대주의는 지배적인 성향을 가진 한 군주 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루이1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예를 통해 비교해보면, 루이14세는 지배적인 절대군주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의 프리드리히2세의 경우 이와 반대의 인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 프리드리히 2세는 융커들이 바라는 일, 융커들에게 새로운 권리와 이권을 보장하는 일밖에 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봉건적인 토대 위에서 성장한 군국주의라는 철제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러워지고 이젠 몸에도 맞지 않는 철제 셔츠를 벗어버릴 뜻도 기력도 없었다." 절대주의는 역사적인 흐름과 사회경제적인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융커:독일의 귀족 대지주-->
2) 절대주의의 비용
# 절대주의의 잔인성
절대주의의 계급운동은 세계사의 다른 운동이 일어난 혁명기와는 달리 '영웅시대'가 없었다. 절대주의는 청년들의 이상적인 투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사용한 방법은 언제나 몹시 야만적이고 또 참으로 조잡한 것이었다. 반대파가 무력하게 자신의 손에 넘어오면 그만큼 절대주의의 강압은 언제나 더욱 심각했고 그때의 야만성은 또 그만큼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절대주의는 그들에 반대한 모든 저항을 짓밟고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 사례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자면,
독일의 제후들이 농민전쟁에 패배한 무기도 없는 농민들을 살해한 경우, "항복한 뮌스터의 재세례교파 교도들의 인육에 군침을 흘렸다는 저 맹수와 같은 잔학성...그것은 마치 발광한 맹수가 사냥감을 막다른 곳에 몰았던 순간, 저 베르제르커와 같은 분노였다."<--조사해볼것: 뮌스터 재세례교파, 베르제르커-->
프랑스에서의 위그노 교도(16 세기 프랑스 신교도)에 대한 박해 사건도 같은 예이다. 이는 다른 종교전쟁이 그렇듯 순수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군주적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절대적 중앙집권으로부터 귀족계급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카톨릭 귀족들은 절대주의에 패배했고 잔인한 복수를 당했다. 영국 청교도와 칼빈교도의 투쟁도 역시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청교도 역시 중앙집권에 패배했고 "영국에서도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야수적인 보복방법이 구사되었다. 그 당시 자기의 권리를 지키는 계급을 레블(rebel)이라고 불렀는데, 지주들이 레블 곧 모반자를 격파했을 때 "그들은 희생자의 몸뚱이에서 창자를 잘라내어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그들의 원한을 풀면서 즐거워했다."
그 외의 자유국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알렉산더 6세(재위 1492-1503. 스페인의 보르지아 집안 출신. 매수정책에 의해 교황이 됨. 사보나롤라를 처형함. 그는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보호함. 그가 그의 사생아 체자레를 조카[nepos]라고 속인 뒤 중용 함으로써
nepotism 이라는 말이 생김/역주)가 막판에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어 마침내 경쟁상대인 추기경 로베레를 굴복시켰을 때 그것은 한 인물이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의 세계제패정책이 프랑스의 세계제패정책을 누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실의 이해관계가 교황권에 대한 두 사람의 입후보자를 통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콘클라베(Konklave :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의 비밀회의/역주)에서의 결정적인 순간에 양파의 승패는 벌써 끝나 있었다. 이전에는 빈번하게 매수가 행해졌으나 이번에는 매수 말고도 독약과 비수로 경쟁이 계속되었다. 보르지아 집안의 독약의 속담에 등장할 정도인 것이다. 보르지아 집안 사람에게 매수된 자객들은 비수나 대검을 손에 들고 맹렬하게 암약했다. 그들의 승리는 말할 것도 없이 스페인의 절대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그 뒤에 추기경 로베레(율리우스 2세. 재위 1503-13. 교황권 강화에 노력하고 프랑스, 독일과 캉브레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의 세력이 증대하자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반 프랑스적이 됨.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보호함/역주)가 마침내 교황의 자리에 앉았을 때 세상이 그에게 "흡혈귀"라는 별명을 붙이게까지 한 그의 참혹한 수법은 기독교라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에 중앙집권의 토대를 강화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후계권이 메디치 집안(곧 레오 10세/역주)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만사는 각본 그대로 진행되었다. 곧 메디치 집안은 당시 피렌체 시민헌법의 마지막 보루를 그들이 대표하는 절대주의를 위해서 폐지하려고 어김없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절대주의의 게급차별
"절대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진정한 승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주의의 역사에서는 어디에서나 우선 타협이 먼저였다. 루이 14 세 시대의 앙시앵 레짐조차도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정신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귀족계급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인민계급(Volksklassen, 곧 classes peoples), 곧 부르조아 계급도 포함된 평민(roture)을 허접쓰레기처럼 경멸한 것이었다. 상인, 노동자, 농민은 지배계급의 눈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였다.
절대주의시대가 되자 사람은 남작 이상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생겼다. 그런 이유에서 절대군주는 귀족계급에만 둘러싸였고 그들만을 접견했고 그들에게만 여러 가지 권리를 주었다. "군주의 절대권력은 인민, 곧 부르조아와 농민만을 그리고 고위 승려계급을 포함한 귀족계급의 경우는 각각의 개인만을 대상으로 했고 신분으로서의 귀족계급은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왕국은 왕의 영지였으나 거기서 나오는 수입은 귀족계급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했다. 농민과 상공인은 귀족계급을 위해 일하고 상비군은 귀족계급을 위해 싸우며 국가의 관료와 수입은 귀족계급을 위해 존재했다"(칼 후고)."
# 절대왕권의 신격화
"절대군주는 유아독존하여 지상의 최고존재로 승격했다. 그는 "vin Gottes Gnaden! (신의 은총에 의하여!)"이 되었다. 그의 지배는 국민의 지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절대주의의 모범소년인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은 "군주는 살아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다. 그런데 신은 나쁜 일에는 직접 손을 대지는 않으나, 독자들도 눈치채고 있듯이, 악마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키는 법이다.
..."국왕의 의지는 최고의 법률이다"가 생겨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설이; 되어 모든 사람의 머리를 지배했고 수백 년에 걸쳐서 큰 소리로는 반대할 수 없는 명백한 신앙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인의 즐거움이니까"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물리쳤다."
"신은 군주가 되어 지상을 걸어다녔다. 절대군주는 바로 살아 있는 신이었다. 따라서 두려움이 앞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신의 걸음걸이였으며, 또 아무나 호흡할 수 없는 다른 분위기가 살아 있는 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
절대군주는 국가를 지배하려 하는 여러 세력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허울뿐인 전지전능함에 의해서 자신이 당연히 살아 있는 신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곧 절대군주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신이 여러 가지 일을 명령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환자의 몸에 손을 얹어 그의 병과 불구를 치료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환자를 진짜로 낫게 했다. 신앙심이 그러한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 절대주의 왕권에 봉사한 예술
"회화에서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고대 희랍에서 따온 장면, 곧 신들의 생활이 정해진 소재였다. 그것은 군주의 생활이며 군주의 지배의 신격화라고 할 수 있다. 쥬피터나 마르스는 군주의 얼굴 모습을 했고 비너스나 쥬노는 왕비를 쏙 빼놓았다. 희랍 신화는 미술에 의해서 왕실의 역사와 군주의 생활의 역사로 바뀌었다. 왕실의 승리는 군주의 승리였다. ...
어떤 인간도 관념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세계에서도 절대군주의 머리 위에 설 수는 없었다. 건축에서 절대주의 미술양식의 최후의 발전단계인 로코코 양식의 궁전은 언제나 단층구조였다. 어떤 인간도 군주 위에 서서는 안 되었으며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었고 또 군주의 머리 위에서 걷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와 신의 관념을 지상에 옮긴 것이었다."
# 절대왕정의 사치와 낭비
"왕국은 군주의 개인 소유물이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도 "국왕은 프랑스의 모든 재산과 토지에 대해서 실질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가?"는 문제가 여러 차례 진지하게 토론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이 언제나 그 놀라운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14세가 세자를 위해 만들도록 한 훈령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과인의 국가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법률적으로는 과인의 소유물이다. 너희 국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민들의 훌륭한 관리인으로서 과인의 국가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언제라도 충당하기 위해서 승속의 소유를 불문하고 일체의 재산을 자유롭게 쓰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
절대군주는 국토의 모든 재산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으므로 그는 모든 조세수입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사치를 위해서 조세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하는 것도 절대주의의 논리로 보면 당연했다. 절대군주는 자기의 변덕스런 사치를 위해서 그가 써도 좋은 금액을 초과하는 일 따위는 물론 계산에 넣지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적자가 생기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국민이었다. 엉망진창의 낭비는 거의 모든 절대주의의 궁정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프랑스는 국가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적자에 이르자 대신까지 완전히 두손을 들었다. 그러나 루이 16 세는 왕비를 위해서 거금 1, 500 만 리브르로 성 크루 성을, 자기를 위해서는 1, 400만 리브르로 랑비에 성을 사들였다. 하룻밤의 도박을 위해 10 만이나 20 만 리브르의 돈을 뿌리는 일은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러시아의 에카테리아 2 세는 그녀의 왕성한 색욕을 채우기 위해 무려 9 천만 루블을 썼다. 그러나 그 엄청난 금액도 루이 15 세가 정부들에게 마구 뿌린 돈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녹원(鹿苑)이라고 불린 베르사이유 궁전의 하렘에 있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 사들인 물품의 값만 해도 수억 리브르나 되었다. 그 금액 가운데는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 넬 자매, 듀바리 부인에게 들어간 방대한 액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네 잎 클로버 가운데 하나인 퐁파두르를 위해서만 국고로부터 수천만 리브르의 거금을 인출했다. 루이 14 세의 비공식적인 첩 관계도 결코 값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 든 것은 루이 14 세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신으로 받들어진 자신을 위해서 훌륭한 궁전을 가지고 싶었고 그 때문에 1년 동안(1685년) 에 9 천만 프랑의 돈을 쏟아 부었다."
프랑스 외에도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태양왕 루이14세의 사례를 모방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건축열 때문에 단기간에 무려 천수백만금을 썼다. 그것은 7년전쟁(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 1756-63/역주)의 가공할 궁핍의 시대로서는 -이 시기는 바로 이 고통의 시대의 뒤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궁핍한 프로이센 인들에게는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 절대왕정 하의 학문
"퇴물이 된 총희들은 대개 많은 연금과 은사품을 받는 대신 사랑의 하사는 보통 단념했다. 루이 14세의 첩이었던 감상적인 라발리에르 양의 뒷자리를 물려받은 몽테스팡은 10년 동안에 걸친 충실한 사랑의 봉사에 대한 위자료로서 매월 1000루이도르(20프랑짜리 금화/역주)의 은급을 받았다. "그 총희 하나에게 프랑스는 유럽과 프랑스 왕국에 있는 학자 전체 급료의 3배나 되는 돈을 주었다"고 그 무렵의 한 저술가가 개탄을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절대주의 시대에 학문이 얼마나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 절대주의 왕정의 국민착취와 부정부패
a) 전제적인 세법
"절대주의가 그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긁어들이기 위해 어느 나라에서나 취한 첫째 수법은 참으로 전제적인 세법이었다. 아무것에나 세금을 부과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조세를 만들어냈다. 세수입을 확보하고 그 위에 세금의 징수업무를 모면하기 위한 꽤 천재적인 방법이 프랑스에서는 페르미에 제네랄 이라고 불린 진세 청부인 제도에 의해 성공했다. 그 제도는 궁정이 신임하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에게 그들이 국왕의 금고에 납입해야 할 일정한 금액이 청부되었다."
b) 관직매매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현금을 매개로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날 로마 교황청이 고위의 사제직을 입찰에 붙여 팔아 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벌이가 좋은 관직이 매매 대상이 되었다."
c) 도시자치권의 몰수
"군주는 도시로부터 자치권을 거두어가 버렸다. 도시가 빼앗긴 자치권을 많은 돈을 지불하고 되사지 않는 경우에는 도시의 공직이나 명예직은 일방적으로 국가의 관직이나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그 경우에도 그것들은 도시주민의 비용에 의해 유지되었고, 더구나 국가는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수수료를 받아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d) 화폐 재주조
"일확천금을 꿈꾸는 콜룸부스의 달걀을 절대주의는 화폐 모양을 바꾸어 재주조하는 수법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탈러, 굴덴, 그로센의 크기를 줄이기만 하면 되었다. 옛 화폐 한 개로 같은 액면의 새 화폐를 몇 개나 주조해 낼 수 있었다. 무일푼이 하룻밤 동안에 재산가인 크뢰수스(옛날 소아시아에 있었던 리디아의 마지막 왕,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임금이었다/역주)가 되는 데는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화폐 경제가 등장한 무렵부터 일치감치 생각해 낸 그 방법이 되풀이해서 악용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 때까지 은화의 액면 표시가 원래 표시의 250배로, 금화의 액면표시는 원래 표시의 150배가되었다. 그럴 때 어떤 방법이 잘 사용되었는가는 국고에 5천만 리브르 이상을 불로소득한 1709년의 프랑스의 대대적인 "개주"와 새로운 "정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군주가 그들의 지독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그런 간악한 타개책을 생각해 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 방면에서 가장 악독하고 또 잘 이용된 수법은 세금, 보증금, 예금과 같은 국고에 납입되는 돈은 양화로 요구하고 국가의 지출이나 봉급은 악화로 내주는 방법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등은 아주 능란한 재정의 명수로서 그런 방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e) 강제공출
"이 방법에 의해서도 낭비로 인한 적자를 보충할 수 없을 때는 대개의 군주는 공공연하게 강도로 돌변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689년에 프랑스 정부는 17세기 후반기에 유행했던 은제집기를 모
두 왕실조폐국에 공출하도록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f) 식량독점
"민중의 궁핍을 이용하여 한목 벌려는 것도 번번이 사용된 수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근이 들 때마다 의례 곡물투기군이 큰돈을 벌었다. 왜냐하면 매점 조합을 조직하여 모든 곡물을 시장으로부터 거두어들이게 됨으로서 기근이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회에 루이 15세는 이른바 "기근에 불을 지르는 도당"과 한패가 되어 폭리를 취하는 곡물 상인으로부터 개평을 떼어 자신의 금고에 막대한 돈을 끌어들였다. 루이 15세가 곡물매점조합인 말리세(Malisset)의 두목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신하의 인명부에는 버젓이 "전하의 곡물매점"을 전담하기 위한 회계과장이었다.오를레앙 공작 부인(엘리자베트 샤를로테/역주)이 루이 15세의 첩 맹트농에 관해서 "전하는 물론 늙은 첩까지 그 해의 농사가 흉년으로 보이면 재빨리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곡물을 매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여자는 참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국민은 굶주림으로 마구 죽어갔습니다"라고 말한 그대로의 사실이 벌어졌다. ...국민이 영원히 식량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상황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절대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의 가장 큰 행복은 신이 내린 국왕의 행복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g) 인신매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결국 큰 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 벌이었다. 세금, 매관매직, 독점등에 의해 국민을 착취하는 수법은 큰 나라에서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작은 나라에서는 그 한계가 더욱 뚜렷했었다. 프랑스 태양왕의 궁정을 흉내내려는 약소국의 절대군주들은 그들의 전제적인 손아귀 속에 있는 국민의 힘을 짜내기 위해 특수한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럴 경우 가장 수지 맞는 방법은 인신매매, 곧 전쟁중인 다른 나라의 군대에, 특히 네덜란드나 영국군대에 자기 나라 사람을 팔아 넘기는 것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나 영국은 잔혹한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인적 자원이 필요했는데, 자국의 국민만으로는 그 수요를 다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자기 나라 군대를 그 나라의 전선에 보내는 것인데 자기 나라에 묶어 두는 일 보다도 더욱 야비한 짓이었다. ... 자기 나라의 인민을 팔아 넘기는 수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소국의 군주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재정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파는 일은 독일의 약소국 절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기반의 하나였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76년부터 1782년까지 영국에 5,723명의 인간을 팔아 넘겼다.(영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이 필요했다/역주). 그 때의 조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총 4,300명의 보병과 경기병을 언제라도 영국정부에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영국의 급료를 받고 있는 동안은 보상비를 계약에 서명한 날로부터 계산해서 1년마다 64,500 독일 탈러씩 증액하기로 약속했다. 또 군대가 영국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으면 그날로부터 보상비를 두 배로, 곧 129,000 탈러로 증액하며 두 배로 증가된 보상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독일로 귀환한 뒤에도 향후 2년동안 계속해서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영국으로부터 병사 1인당 1년에 30 탈러의 징발 자금을 받았으며, 전사자 1인당 40 탈러의 보상금과 부상자 3인당 같은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로로 팔린 사람들 가운데 1783년에 무사 귀국한 사람은 2,708명이었다. 그 숫자를 5,723명에서 빼면 3,015명이 없어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그 3,015명이 모두 전사한 것은 아니고 "그 일부분은 가엽게도 미국에서 거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레싱의 고귀한 패트론(페르디난트는 만년에 학자와 예술가를 보호했다/역주)은 병사들 가운데 전상을 입거나 불구가 된 자들은 미국에 버려 두고 귀국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팔아먹은 인간이라는 상품에 대해 영국이 지불하는 피의 급료를 챙기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교활한 재정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 불행한 인간들에게서 3중의 이윤을 긁어냈다. 첫째로 병사들의 건강한 육체를 팔아 넘김으로써, 둘째로 병사들의 부상한 육체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셋째로 불구폐질자가 된 병사들을 외국에서 거지 노릇이나 하게 해서 그들에게 지불해야할 수당을 절약함으로써 였다. 그가 그러한 놀라운 "재정개혁"에 의해 500만 탈러 이상의 현금을 자기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메링, 레싱의 전설). ..
뷔르템베르크 공작<--칼 오이겐 공작-->도 매우 악독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혈육까지 아프리카의 살인은행에 팔아 넘겼다. 그는 장기간에 걸쳐 네덜란드의 화폐와 이해관계를 위해 일한 살인은행의 가장 큰 어용 상인이었다.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많은 첩의 자식들에게 모조리 프랑크몽(Franquemont)이란 성을 붙였는데, 네덜란드와의 계약에 의해 그가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파견한 각종 군대 가운데는 그의 아들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물론 뷔르템베르크 공작이라는 인신매매자는 자기의 아들들을 농민의 자식들과 같이 값싼 계약조건으로 팔지는 않았다. 그런 상품이나 희생자는 그 값이 훨씬 높았다. 그 아들들은 장교감이었던 것이다. 곧 장교의 경우에는 그 계급에 상응해서 보통 군인에게 지불되는 금액의 3배 이상으로 계약되었다.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 간 프랑크몽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첫째 프랑크몽은 사막에서 쇠약해진 나머지 객사했다. 둘째 프랑크몽인 프리드리히는 온갖 고초를 겪다가 13년만에 겨우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팔아 넘긴 가엾은 자식들 가운데 다시 조국의 땅을 밟은 몇 명 안 되는 자식 중 하나였다. 살아남았지만, 귀국 도중에 탈주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던 아들들은 거의 바타비아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거기서 흑사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파렴치한 인신매매를 비판할 경우, 특히 외국에 팔아 넘긴 군대 중에서 자발적으로 아프리카행 군인모집에 응한 자원병은 거의 없었다는 주위의 사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는 강제로 군대에 징발되었던 것이다. 병역의무가 있는 장정이라고 해서 간단히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서인도의 노예상인이 검둥이 상품을 조달하던 식으로 사냥된 사람들도 있었다.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들이 한창 밭일을 하던 중에, 밤중에 잠자리에서, 또 술에 취해 있을 때에 강제로 끌려갔다. 일단 군주의 재산으로 편입된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 큰자식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아버지가 있는 수많은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공포와 불안 때문에 밤에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절대군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약소 군주들이 행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이러한 "재정개혁"의 모든 수법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h) 출판 검열 통제
"절대권력의 소유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일도 역시 큰 범죄가 되었다. 비판은 곧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를 저지를 자는 종신금고형이라는 비교적 그 당시로서는 관대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정치범은 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대중에게 호소해야 비로소 정치범이 되었다. 군주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따위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엉뚱한 유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것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아주 합리적인 대항수단을 취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하고 재빠른 예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죽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국의 군주들이 유령퇴치를 위해 동원한 무서운 수단은 검열이라는 것이었다. 절대주의의 손에 의해 검열이 모범적으로 시행된 결과, 민중이 접근할 수 있는 책이란 카톨릭 국가에서는 성도전 뿐이었다."
"정통파라는 것은 카톨릭교의 삭발머리에 걸치든 프로테스탄트의 법복에 걸치든 참으로 단단한 것이었다. 제주이트회의 수도사는 "천국에 가려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포로가 된 이성을 가져야 한다" 고 가르쳤다. 여기서 말하는 "포로가 된 이성"이란 현상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학문은 화석화하거나 까다로운 형식주의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따라서 가장 밑바닥의 인민계급에게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소름끼치는 무지와 끝없는 미신이 만연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통파에 의해서 억압되고 봉쇄된 대중은 될대로 되라는 체념에 짓눌려 있었다. ...
30년 전쟁 뒤에도 절대주의가 취한 수법들은 물론 어디서나 국민의 마음에서 그 무서운 악목을 씻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씻어주기는커녕 그 수법은 오히려 그 무서운 악몽을 미리 속에 목 박아 버렸다. 그 결과 100년 이사 독일의 인민은 언젠가 한번은 이 세상에 아름다운 여명이 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은 탄식의 골짜기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 곳곳에 진을 친 종교단체, 곧 형제교단이나 자매교단의 대두는 사회에 팽배한 절망감의 반영이었다."
# 절대주의 시대의 특권계층
"부르조아 계급, 귀족계급, 승려계급 가운데서도 겨우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들만이 그러한 낭비를 즐길 수 있었고 또 즐겼다. 앙시앵 레짐의 주요 계급인 이 세 계급은 그 각 계급의 내부에서도 역시 격차가 심각했다. 세 계급가운데 한줌밖에 안 되는 자들만이 언제나 절대주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 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귀족계급의 가구수는 많아야 3만이었고 그 총 인구는 14만 명 정도였다. 그 귀족계급 가운데서도 자신의 봉건적인 기존직업을 버리고 자진해서 궁정귀족으로 변신한 자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
부르조아 계급의 경우에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류는 가장 위에 위치한 그야말로 한줌에 지나지 않는 계층, 곧 금융세력의 대표들뿐이었다. 산업자본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나 턱걸이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양식은 아직 소규모생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귀족계급은 소비생활과 사치에 돈을 물쓰는 듯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그 부류들과 적어도 대등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점은 절대주의의 사고방식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금융조작에 의해서 방대한 부가 부르조아 계급의 금융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밖에도 원시축적의 시대에는 개같이 쓰는 것이 언제나 부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때문에 부르조아 계급은 언제나 여봐란 듯이 사치에 파묻힌 생활을 했으며, 특히 귀족계급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기를 썼다."
"이 한줌의 온갖 광태, 어이없는 변덕, 일시적인 기분에 탐닉하기 위해서는 전체 인구의 95%가 굶어 죽든가 그렇지 않으면 빈곤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그날 그날을 지내야 했다. 거기에 절대주의의 가장 심각한 그리고 진정한 비극이 있었다. 기생계급은 인간의 존엄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전대주의는 모순이나 반항에 부딪치지도 않고 얼마나 쉽게 그 야수성을 발휘했던가?"
# 절대주의의 종말
"요약하면 이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곧 절대주의의 역사는 유럽 문명의 거대한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길이 대부분의 인민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역사의 필연성이었다는 것은 그런 대로 위안을 준다. 그리고 첫째, 절대주의시대의 지배적인 현상은 현대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둘째, 뿌리째 변혁된 역사단계에 의해서 절대주의적 재배를 일시적으로라도 부흥시키려는 시도 따위는 장래의 어떤 시대에도 다시는 부활되지 않을 과거의 꿈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 마지막으로 절대주의의 힘이 그토록 가공할 야수성을 발휘하게 된 토대, 또 그 역사적 현상이 어느 나라에서나 야수성을 띠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곧 권력을 손에 넣었을때의 야만성 그리고 한번 손에 넣은 권력을 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똑같은 박자로 남용하려고 했던 수법은 여;r시 앞에서도 말했듯이 절대주의라는 역사적 존재의 특수한 전제에 바탕하고 있다. 절대주의의 대두는 순전히 역사의 필연성이었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성립은 역사의 획을 긋는 진보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절대주의는 유기적인 조직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단계와 연결되는 정치형태가 되지 못했다. 생산단계와 연결된 정치형태만이 유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는 일시적인 정치적 기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육체에 파고든 기생충이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의 혁명기에조차 지배적 현상이었다. 절대주의는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발흥하는 부르조아 계급과 몰락하는 봉건주의의 불가피했던 계급투쟁에서 생긴 어떤 정치적인 기회, 곧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서로 다투는 두 계급 사이의 상대적인 진공상태를 교묘하게 자기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이용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제3제였다. 그런데 그 운 좋은 제3자는 아무래도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죽은 자의 몫을 차지할 수 없었다. 군주가 하나의 계급이 되어 다른 계급을 견제하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즉각적인 야만스런 폭력을 선동했고 그와 같은 원인에 의해서 차례차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이 만들어져 나갔다. 그 상태는 신흥계급-부르조아 계급-이 절대적으로 강력하게 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결국 신흥계급은 그 기생충의 폐해를 막고 그것을 자기 몸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현상고착의 외피는 변화해가는 내용을 이미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제거하는 작업은 영국에서는 1649년의 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1789년의 대혁명으로 이루어졌다."
# 유럽 각국 절대주의의 차이
각국의 경제적인 기반에 따라 절대주의의 형태는 차이가 보인다. "그 차이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차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밝히고, 특히 그 차이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국의 문화수준의 큰 차이, 곧 프랑스 절대주의문화가 왜 모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압도하고 전 유럽의 동경의 표적이 되었는가, 지역적 개념에 불과했던 독일이지만, 북부독일과 중부독일이 왜 그처럼 크게 달랐는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스페인
"절대주의는 스페인에서 첫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스페인은 다른 나라에 비해 거의 100년이나 앞서 특수한 절대주의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절대주의는 절대 접근 불가능을 첫째의 특징으로 하는 권위적인 형태였다. 그러한 형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스페인에서 절대군주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권위에 대한 관념은 항상 가장 높은 곳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것이 그 뒤의 모든 시대에 모범이 되었다."
b) 프랑스
"17세기 말경이 되면 어느 나라에서나 프랑스의 절대주의형태가 스페인의 절대주의형태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프랑스 풍의 에티켓과 풍속이 모범이 되었다. 스페인은 파산해서 세계를 제패했던 지위도 잃게되어 프랑스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모든 방면에서 스페인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이 시작한 것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시켰으며 그 이래로 프랑스 궁정의 방식들이 유럽에서 줄고 큰 영향력을 미쳤다. ...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첫째, 경제적 토대가 절대주의를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정치권력의 집중화가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파리로 말하더라도 그곳-파리에는 중앙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은 어떤 측면에서도 인공적으로 무리하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우선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파리는 일찍부터 국제무역의 교차점이 됨으로써 자연히 절대주의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프랑스 절대주의는 물질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풍족했다. 파리 이외의 그 어디도 절대주의가 그처럼 활수한 고객이었던 곳은 없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든 생활-곧 파리의 방대한 인구의 생활-이 절대주의의 이해관계와 일치하고 절대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곳도 없었다. 그러므로 절대주의의 이론적 체계화도 파리에서 첫 고고지성을 울렸고 절대주의의 최고의 예술적 승화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로코코라는 예술양식에 의해 이룩되었다."
c) 독일
"독일을 역사에서 후퇴시킨 가장 큰 원인은 이미 16세기초에 나타났다. 곧 동인도항로의 발견으로 15세기 말부터 무역로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번영은 생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대부분이 중개무역, 곧 거간으로서의 활동-독일은 거대한 국제무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에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역로가 바뀌자 독일의 경제적 발전은 곧 장애에 부딪쳤고 이제까지 내 세상을 구가하던 독일의 부자들도 하룻함 사이에 가난뱅이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대변동은 30년 전쟁에 의해서-곧 그 전쟁이 독일에 지운 부담이나 독일의 숙명적인 정치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국분립주의의 영구화에 의해서 더욱 복잡한 것이 되었다. 더구나 그 전쟁은 독일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의 중앙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저지했고 그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든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부르조아아적 국가 혁명에 실패하고 역사의 낙오자가 되었다. 영국이 일찌기 1649년에, 프랑스가 1789년에 돌입한 혁명의 도정에 독일이 발을 내디딘 것은 겨우 1848년이었고 그나마도 어중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전혀 독일이 유기적인 발전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자연히 절대주의시대의 독일은 불행한 특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특수성은 첫째, 독일은 1600년부터 1760년까지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 그 시대의 하층계급은 독일의 어느 나라에서도 자발적인 역사의 담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 셋째, 독일에서의 혁명적 부르조아의 에너지는 아주 뒤늦게 폭발했다는 것, 넷째, 독일인의 노예근성은, 독일인의 전형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속담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독일의 걸인경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돌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곧 독일군주들의 가문의 야만성은 아주 특수한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불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주의시대에 군주가 되었던 독일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야만적이었음은 그 당시에 이미 뜻 있는 사람들을 전율케 한 사실이었다. ...
"독일의 군주들은 인민의 노동의 결정을 갉아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피를 빨아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역사의 책임이 문제가 된다. 그 누가 독일의 작은 나라들의 군주가 되었더라도 그 역시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백성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일이 자기의 가장 큰 재원이 되며, 백성을 날마다 배반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기반을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던 절대주의시대의 한줌 군주계급은 어디로 보나 도덕주의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주계급 그 차체가 바로 악의 학교였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전체가 꼭 같은 모습이라곤 할 수 없다. ... 작센은 독일의 다른 나라들, 특히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마치프랑스가 독일 전체에 대해서 가진 것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작센은 은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세 말기부터 독일의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풍요하고 번영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 은광 덕에 베틴 가는 미술이나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환경이 좋은 온상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찌감치 16세기에 작센에는 절대주의문화가 크게 발달했고, 예를 들면 독일 미술의 최초의 세속적 화가 루카스 크라나하 2세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크라나하처럼 근대적으로, 곧 "세속적으로" 여자의 육체를 그린 화가는 독일 르네상스의 미술계에서는 그가 유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독일에는 제2의 크라나하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진 토양이 작센 이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작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일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자들이 멕시코의 은광을 대대적으로 채굴하게 되고 그 때문에 작센의 광산업이 궁지에 몰렸을 때도 작센의 문화는 그 은광 덕택에 여전히 이제까지의 우월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작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도시조직으로서는 파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제적 발전의 유기적인 산물이었다. 두 도시는 17세기와 18세기에 파리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의 독일문화의 최고 수준에 있었다. 드레이덴은 독일이 그 시대에 낳은 최고의 예술문화를 대표했고 라이프치히는 "당대의 독일세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세계"를 보여주었다. 드레이덴과 라이프치히는 누구나 알아주는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였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위대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가 거의 30년 동안이나 합창 지휘자로서 활약했고, 레싱이나 괴테도 일찍이 라이프치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했고 그들의 천재를 가장 높이 발휘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작센의 각 대학들에서 독일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고고지성을 울렸다.
d) 영국
"영국은 아주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아주 짧게 그것도 특수한 절대주의시대를 겪었다. 그 절대주의시대는 영국대혁명 이후 겨우30년 동안 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 시대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로 불렸는데, 찰스 2세가 그 대표였다. ... 찰스2세도 역시 프랑스의 태양왕을 그의 빛나는 모범으로 삼았고 그 모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승리를 뜻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특수한 영국적 양상은 그 짧은 기간에 뻗어나아갈 수가 없었고, 따라서 프랑스 문화도 대륙에서 모든 나라를 프랑스화한 것처럼 영국문화를 프랑스화할 수는 없었다. 그럿은 1649년의 혁명이 너무나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절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타협이라는 것이 프랑스 이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왕정복고 기간 중에도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절대 주의를 강력하게 견제했고 마지막으로 제임즈 2세의 짧은 지배가 끝난 뒤 그들에게 한푼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군주제와의 거래를 재빨리 끊어버렸다. 이어서 18세기에 들어서자 인도라는 보고에서 부진장한 부가 런던으로 흘러들어왔고 그 덕택으로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가 되자 그들은 재빨리 프랑스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은 일찍부터 그들을 자주독립적인 방향으로 교육시켰고 그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절대주의문화의 식탁에 초대된 적은 있었으나 결코 프랑스에 굴복한 일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현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은 프랑스 문화를 그들 마음대로 그로테스크하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프랑스 문화는 영국에서 도리어 억압되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조아 국가는 문화에서도 재빠르게 완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부르조아 국가와 더불어 순수한 부르조아 문화도 탄생되었다. 확실히 부르조아 문화는 불사조처럼 절대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약무인한 어릿광대처럼 세계의 무대로 뛰쳐나왔다. 그 어릿광대는 옛 세계를 향해 으스대며 "나는 만장하신 여러분의 상속인입니다" 라고 외치기 위해 온 세계의 문화를 끌어모아 자기의 의상을 스스로 지어 입는 장난을 해왔던 것이다."
- 책에서 다루는 풍속의 범위는 성 모랄-결혼제도와 성에 대한 관점과 태도, 그리고 이와 연관지어 볼 수 있는 복식이나 예의범절과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다.
- '풍속'이라는 하부구조를 통해 각 시대와 계층의 사회-경제적인 필요 또는 목적이라는 상부구조를 설명하고 있다.
- 헤겔철학의 세계관과 맑시즘('계급의식'과 '계급투쟁' 부분 주의해서 읽을 것.)과 유물론에 기반하여 논리를 전개한다.
- 하지만 헤겔의 한계를 직시할 것. -유럽사를 인류사와 동일시하는 한계- 실제로 지금까지 읽은 모든 사례는 서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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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랄의 기원과 본질
1) 일부일처제의 기원과 그 토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오늘날의 모든 문명의 토대는 사유재산제이다." 사유재산제는 성모랄 분야에서도 그 토대의 형태를 결정하며 형성하고 이 토대의 형태가 바로 일부일처제이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과는 무관하다. "개인적인 성적 사랑을 일부일처제의 토대라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제도로서의 일부일처제가 추구하고 있는 이상에 불과하다." 일부일처제는 사유재산을 한 사람(남성)이 독점하고 이를 자손에게 상속시키기 위한 목적의 결혼제도이다. "아내는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오직 정해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잉태된 자식들을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 인은 일부일처제를 남녀의 화해의 결과라든가 결혼의 최고의 형태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 그 이전에는 (인간의) 역사에서 한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남녀의 투쟁의 선언"이라고 했다.
일부일처제는 개인적인 성적 사랑이 아닌 인습 위에 구축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적인 조건이 아니라 경제적인 조건 위에 세워진 것이다. 경제적인 조건은 오직 남성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고 그러므로 일부일처제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억압이라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발생은 여자에게만 일부일처제를 요구했다." "결혼 생활에서 남자는 지배계급의 위치에 있고 여자는 피압박계급 및 피착취계급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언제나 남자만이 입법자였다. 이 입법자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법률을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아비는 항상 지어미의 순결을 엄격아헤 요구하고 지어미의 부정에 대해서는 최대의 범죄라는 낙인을 찍었지만, 자신의 성욕에 대해서는 언제나 미온적이고 원시적인 제한만을 두어 의연한 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와 같은 논리는 모두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사물 자체의 필연성, 즉 "사물의 자연스러운 질서"에 불과했다."
그러나 일부일처제에 반하는 "자연의 복수"가 나타났는데 간통과 매춘이 그것이다. "간통과 매춘은 피할 수 없는 사회의 구조이며 지어미의 정부, 오쟁이진 지아비, 매춘부는 어느 시대에서도 없어지지 않는 사회의 구조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2) 성 모랄의 여러 가지 변화
시대와 계층에 따라 결혼의 다양한 형태와 결혼생활에서 여성과 남성에게 부과되었던 도덕률 그리고 매춘과 매춘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다.
# 결혼의 여러가지 형태와 아내 상<--결혼 문제 언급하면서 참고할 것-->
"연애결혼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간주되었던 시대와 계급이 있는 반면 연애와 결혼은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되어 아주 타산적인 처지에서 노골적으로 "자식을 낳는 암말"로서 아내를 취했던 시대와 계급도 있었다. 아내는 가축이자 노동하는 동물이었으며 평생 동안 속박된 가내 노예로서 자신의 의지란 전혀 없는 오직 참고 견디는 분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시대에는 아내는 눈에 넣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러운 인형 혹은 응석부리는 사치품이거나, 자신의 선배인 남편의 첩들이 남편을 즐겁게 하여 남편을 사로잡았던 것과 마찬가지의 노력을 침실에서 남편에게 바치는 것을 유일한 임무로 여기는 향락물 혹은 세련된 향락 도구로까지 여겨졌다." "마지막으로 부부는 두 사람의 동지, 즉 같이 손을 잡고 인생의 험한 비탈길을 기어올라 자신들의 높은 이상을 향하여 전진하는 믿을 만한 동지라고 생각한 시대나 계급도 있었다."
"처녀가 애완물로 교육이 되는가 아니면 필수품으로 교육이 되는가<--또는 남성의 동지가 되는 한 인간으로 교육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의해서 결정된다."
성 모랄의 근본문제에 대해서는 각 시대에 따라 다양한 사례가 있는데, 이런 사례들은 성 모랄의 하부구조와 연결되어있다. 하부구조인 언어,복장,수치심,교육,예술,법률 등을 통해서 성모랄의 변천을 파악할 수 있다.
시대와 계층(경제적 계층과 젠더계층)에 따라 풍속(언행과 태도, 복장 등)은 다르며, 도덕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요컨대 사회도덕의 전체적인 차이는 시대와는 관계없는 우연의 소치가 아니며, 시대의 모습으로부터 제멋대로 배제해버릴 수 있는 우연도 아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차이 속에서 일반 사회생활의 저류를 형성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과 그 저류의 필연적인 결과를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모순된 여러 현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아주 정연한 질서가 있다. 거기에는 무의식적이고 상상할 수 없는 혼돈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는커녕 전사회적으로 관철되는 경향 가운데서 언제나 그리고 도처에서 하나의 엄격한 법칙이 그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헤겔적인) '엄격한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어떠한 사회도덕이 어떻게 하여 생겨났는가, 그러한 사회도덕이 어디에서 그렇게 강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는가, 그러한 영구한 변화와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내는 요인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성 모랄의 모든 상수 중에서 끊임없이 현상을 변화시키는 필연적인 변수가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법칙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3) 변혁의 법칙
변천의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각 시대의 '도덕의 표준'을 각 시대의 사회생활과 결부시켜 조사하는 데서 시작하겠다. "역사와 연관관계가 없는 대중현상이란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사고방식은 생산관계를 축으로 발전하게 되며 그 발전단계의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사유제산제, 즉 물질적인 이해관계가 성 모랄의 모든 토대를 결정하고 또 싫든 좋든 끊임없이 성 모랄의 하부구조를 결정한다."
성욕 자체는 경제적인 동력이 아닐지라도 성욕의 배출구는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 결정된다.
"성욕-대중현상으로 간주되고 인정되는 모든 성욕-이 남녀를 일찍 결혼하도록 하는가 늦게 결혼 하도록 하는가, 결혼의 대용품으로 첩을 두는가 매춘부를 찾는가, 상류의 유한마담을 구하는가 타락한 타이피스트를 구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처녀가 결혼하여 주부가 되는가 어머니가 되는가 귀부인이 되는가, 처녀를 고르는 기준이 애를 잘 낳을 수 있는 체격이 되는가 아니면 아름다움이 되는가, 처녀가 애완물로 교육이 되는가 아니면 필수품으로 교육이 되는가는 경제적인 토대에의해서 결정된다. 부부의 순결이 가장 중요한가 아니면 성생활의 자극적인 향락이 가장 중요한가는 경제적인 토대에 의해서 결정된다."
또한 모든 성행동의 하부구조인 복장이나 예절 등도 경제적인 토대와 결부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항상 "정신과 물질 가운데 나타나는 부차적인 현상이다." <--눼눼, 독일철학자시군요.-->
# 성 모랄과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연관관계에 대한 실례.
a) 독일의 일부이처제
17세기중반 독일 뉘렌베르크 지방에서는 30년 전쟁으로 인구(특히 남성인구)가 줄어들자 남성이 2명의 여성을 부양하는 결혼제도를 권장했다.
"30년간전쟁전에 독일의 인구는 1,600만에서 1,700만을 헤아렸는데 전쟁이 끝난후인 1648년의 총인구는 실로 400만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 400만의 인구 중에서도 남자의 수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다. 남자의 수는 여자 2.5명에 대하여 1.5명의 비율이었다. 이것은 전재의 비참한 결과였다.
자식의 생산,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생산하는 것이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경제적 요구였고 따라서 그것이 생식능력이 있는 모든 남자의 가장 고귀한 도덕적인 의무였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당시까지의 근본적인 도덕관과 모순된 것이었으므로 이번에는 정부가 나서서 남자는 모두 이 방면에 전력을 기울일 것이며 무조건 이 의무를 이행할 것을 공개적으로 엄명했다.
그것에 대한 증거가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징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증거는 분명히 있다. 이 시애의 얼마되지 않는 공문서 속에서 우리는 이 증거를 명확히 찾아볼 수 있다. 1650년 2월 14일 뉘렌베르크 지방의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를 했다.
그러므로 신성로마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이 피비린내나는 30년전쟁 시기에 전쟁과 전염병과 기아 때문에 잃어버린 군사를 다시 보충하고...하는 것을 요구한다. 금후 10년간 모든 남자는 두 사람의 아내를 거느릴 수 있도록 허용한다.
만약 당시까지의 도덕을 뒤집어 엎는 경제적 토대가 형성되지 않았더라면 이 공인된 목표가 위와 같은 간단한 문장으로 나타났을 리가 없다."
b) 농촌지역의 아내 돌림빵
"여기에 보쿰(Bockum)국법 중의 한 기록을 원문 그대로 소개해보겠다.
더구나 진실한 아내를 두고 있는 남편은 그의 아내의 여자로서의 권릴르 충분히 거두어줄 수 없을 때에는 아내를 이웃사람에게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이웃사람이 그녀를 충분히 도와줄 수 없을 경우에는 그는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보듬고 고통을 주지 말고, 자식을 줄 수 있는 아홉 남자에게 차례로 데리고 가서 부드럽게 내려 놓고 고통을 주지말고 5시간 동안 거기에 둔 다음 그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큰 소리로 외치게 해야한다. 그래도 그 여자의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못할 경우에는 그 이웃사람은 그 여자를 다정스럽게 껴안을 다음 천천히 내려놓고 고통을 주지 말고 그 여자에게 새옷과 여비가 든 돈지갑을 주어 대목장으로 보내야만 한다. 이렇게 해도 다른 사람들이 그 여자를 도울 수가 없을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만이 그 여자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을 오늘날의 말로 해석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건강하지만 애를 낳지 못하는 아내를 가진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대를 이을 아이를 잉태하게 해줄 가능성이 있는 남자의 침대에 자신의 아내를 보내야 하며 그 사람의 힘으로도 애를 갖게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제2, 제3의 이웃사람에게도 시험해 보아야 하고 모두 실패할 경우에는 수천의 악마가 아내를 돕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애를 낳는 것은 확실히 여자의 의무였다. 왜냐하면 자식을 낳는다는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아이를 낳는 분만도구가 되는 것은 모든 여성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기 때문이다."
농촌지역에서의 사고방식과 성 모랄은 농촌경제(농촌의 물질적 이해관계와 결합되어 있다. 농민에게 가장 중요한 자본은 자식이다. 자식은 가장 값싸게 오랜 시간동안 노동력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혈통보다는 자식이라는 자본을 얻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 경우 개인적인 애정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적 남자의 생식능력이 중요했으며 이 때문에 아내는 자식을 낳은 동물로 취급되었고 자식을 낳지 못할 경우에는 오늘을 이 남자에게로 내일을 저 남자에게로 보내졌다." <--그러나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할 경우에는 버림받을 수밖에;;-->
# 계급(경제력의 차이)에 따른 성모랄의 차이: 16 세기 수공업 마스터들과 상인들의 예.
같은 시대에도 계급 간의 이해관계의 차이로 인해 성 모랄의 차이가 보인다. "16세기의 수공업 마스터들과 상인들간의 결혼관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수공업 마스터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가정의 충실한 고문이었고 집안을 정돈하고 부엌이나 술창고를 돌보는 엄격하면서도 정숙한 주부였지만 돈 많은 상인들에게 있어서 아내는 주부이자 관능적인 향락에만 이용되는 시녀였다.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은 두 계급의 전혀 다른 경제적인 틀 속에 뿌리를 둔다."
수공업 마스터의 경제적인 위치에 적합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그 계층의 아내들은 검소하고 부지런한 주부로서의 생활양식을 요구받았다.
반면 돈 많은 상인들의 아내는 재산으로 인해 노동에서 해방되고 남편에 의해 사치품으로 취급받게 되었다. "사치품이 된다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여성해방의 단초였다. 우선 첫째로는 점점 더 늘어가는 재산 덕으로 남편은 아내를 사치품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아내가 사치품이 되어감으로써 주부로서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당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규칙이 아내에게 적용되게 되었다. 아내는 남편의 생활을 장식하고 남편의 쾌락의 횟수를 증가시키는 최상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었다. ... 상인의 아내로서의 임무는 아내에게 전혀 다른 생활형태를 강요했고 따라서 전혀 다른 도덕을 강요했다. 수공업 마스터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부차적인 것이었던 남편에 대한 향락봉사가 상인의 아내에게 있어서는 전면에 나서게 되어 그것이 아내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되었다. 아내는 최상을 사치품이었고 최상의 향락도구였다. 아내는 매일 향락을 준비하고 그것을 신선하게 해야만 했다. 아내가 오랜 기간 그러한 임무를 훌륭하게 해내면 해낼수록 그만큼 아내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사치의 정도는 분명히 재산의 크기를 과시한다. 이것은 자본이 처음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던 당시에는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내는 가장 사랑 받는 사치품으로서 이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또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었다." "아내들에게는 인생이 영원한 축제일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것은 남아도는 재산으로부터 저절로 생겨난 논리였고 또 요구였다. ... 그것은 정말로 축제 속의 인생 그것이었다. 아내에게 재산이나 노고, 쓰레기 등을 생각나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한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은 모두 아내의 주변으로부터 추방되어버렸다. ... 이러한 것 속에는 인생의 가장 신성한 임무인 어머니로서의 임무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아내에게서 사교를 빼앗고 축제기분을 오랜 기간 동안 깨뜨려놓는다. 그리고 그것은 특히 육체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애를 낳는 것은 젊은 아내를 늙게 만들고 또 어린애에게 젖을 먹여야 하기 때문에 유방은 남자를 유혹하는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결혼의 목적으로서의 모성이라는 하늘이 준 임무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서 결국은 불가피한 불행이라는 의미로까지 격하되어버렸다."<--여성과 모성에 대한 동시대의 문제와 관점에서도 적용가능한가?-->
이 계층에서는 간통도 사회적으로 위험한 행위가 아니었으며 도리어 사교적인 덕성으로 인정받았다. "다만 문화적 발전이 그 노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이었다. 미개시대에는 난폭한 싸움이 유희의 규칙이었지만 바로 그와 반대의 극단으로 이때의 그 규칙은 공상의 탕음난무(Orgie)에 지나지 않는 세련된 플러트(flirt)로 바뀌어버렸다..."
이와 같이 16세기라는 동시대에도 수공업 마스터와 돈 많은 상인들의 성 모럴에는 차이가 있으며 각기 다른 계층의 아내들은 그 계급이 요구하는 특별한 예의범적을 준수해야 했다. 각 계급의 특수한 예의범절이나 도덕돤은 특수한 계급의 이익과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도덕의 차이는 계급적인 이데올로기로 발전되기도 하며, 이런 흐름은 '계급차별에 대한 강한 충동'과 '계급연대에 대한 강한 충돌'에 의해 강화된다.
# 계급도덕이 다르게 발전하는 이유
a) 계급차별
계급도덕이 각기 다르게 발전한 까닭은 각 계급의 경제적인 상황과 목적이 다르기 때문인데, 한 계급에 속한 개인은 그 도덕률에 전적으로 구속되었다. "귀족노파가 쭈글쭈글한 유방을 드러내놓아 보는 사람들을 소름끼치게 하거나 구역질나게 하더라도 이 노파는 "예의범절을 지키는" 것이었지만 아름다운 시민계급의 여자가 코르셋의 보물을 과시하여 보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도 그것은 "풍속을 어지럽히는" 것이 되었다."
또한 계급도덕이 각기 다르게 적용되는 이유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권력 차이 때문이다. "소시민수공업자가 16 세기에 들어와 점점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그 시대의 욕탕생활이 인간생활에서 맡았던 훌륭한 역할대로 매일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얼굴을 맞대고 그 결과 목욕탕이 주제넘은 귀족이나 도시귀족의 지배에 대한 반항의 중심지로 변하게 되자 항상 자신들의 지배권을 내세워 협박하던 지배계급은 기다렸다는 듯이 목욕탕을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장소라고 선언했고 권력이 흔들릴 경우에는 즉시 목욕탕을 폐쇄해버렸다. 바로 이것이 매독에 이어서 16 세기에 욕탕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한 제2의 원인이었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도덕을 피지배계급에게 강요하곤 했지만, 자신의 경제적 이익에 부합하는 피지배계급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농업노동자나 공장노동자의 남녀가 직장이나 가정에서 항상 어쩔 수 없이 육체를 맞부딪칠 경우나 부모나 어린이들, 동숙하는 청년이나 처녀, 성년자나 미성년자가 좁은 침실에서 뒤섞여 잠을 잠으로써 어른들의 성생활이 매일 어린이나 젊은이들에게 현장교육을 제공하게 되었지만 이 경우 지배계급은 수세기 이래로 한번도 그것이 풍기를 문란하게 하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내부에서만은 남녀가 몸을 밀착시키지 않도록 강제하였지만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이러한 상태가 아무리 악화되더라도 적절한 방법을 통해서 개선시켜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모순도 또한 도리에 맞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가 자신들의 지배이익과 경제적 이익에 적합했고 따라서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사회적 요구였기 때문이다.
b) 계급연대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관은 그 계급의 사회적인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른 계급과의 차별은 그 계급 내에서의 연대감을 형성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그것은 공동의 제복이나 견장과도 같은 것이며 또한 하나의 슬로건 아래 모인다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슬로건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된다."
# 젠더에 따라 다른 성 모랄이 적용된 이유 - 권력과 계급의 차이.
위와 같은 이유로, 남성에게 성적인 자유와 문란함을 허용하는 반면 여성에게 성적 순결을 강요하는 이유는 남성과 여성이 젠더에 따른 권력차 때문이다. <--계급차별의 세가지 요소는 정확하게 적용되지만 계급연대는 적용하기 어려울 듯 싶다.-->
"이 경우 동일한 사회의 인간이라는 것을 동일한 계급에 속한 인간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배의 결과를 평범한 실례로써 설명하기 위해 유산계급의 비합법적인 연애관계에 대한 규정을 여기에 소개해보겠다. 귀족계급이나 시민계급의 청년이 숨겨놓은 여자가 있으면서도 이 다방 저 다방에서 많은 중매인들의 주선으로 부자나 귀족의 딸과 선을 보더라도 이 청년은 그 계급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부도덕한 사람이 아니다. ... 그리고 버린 여자의 후임자로 집에 들어 앉히려고 하는 "행복한 새색시"가 자신과 결혼하기 이전 수년 동안 이 지아비가 이 여자 저 여자와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은 물론 많은 창녀와 관계하고 거기에다가 유부녀를 차례로 유혹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 그 남편이 뻔뻔스럽게 신부의 육체의 순결을 기대하더라도 또는 신부가 신랑에게 허용할 수밖에 없는 최초의 성교에서 신부가 처녀라는 증거를 확보하는 것... 다른 남자가 이전에 아내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 즉 아내에게 "과거"가 있다는 것을 결혼 후에 남편이 알았을 경우, 이와 동일한 계급도덕은 남편에게 그러한 아내는 부정한 아내로서 지체없이 쫓아내더라도 괜찮다는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또 어떤 처녀가 어떤 남자로부터 유혹을 받아 임신을 했을 경우에도 그 남자는 그 처녀를 버려도 괜찮았다. 자신들의 계급도덕의 관점에서는 남자는 그 상대가 사생아를 낳고 자신이 그 아이의 정당한 부친이더라도 그 처녀와 어떻게든 결혼해야만 한다는 책임은 지지 않았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 결론: 성 모랄의 공식
시대, 민족, 특정 계급에 따른 다양한 성 모랄을 공식으로 정리하면,
"첫째, 사회의 모든 질서는 그 사회현상 그 자체를 도덕률로써 제시하던가 아니면 사회를
유지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에 의해서 사회의 성립조건을 강화하고 또는 완전히 지키는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공식화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는 그 특수한 삶의 이해관계에 대립하는
것, 사회의 토대로서의 제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며 부당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둘째,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각각의 미세한 것에까지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결코 동질의 단일한 것이 아니라 항상 서로 모순된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으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계급이익에
따라서 모든 도덕규칙을 다양하게 변경하거나 개정한다. 바꾸어 말하면 각 계급은 자신의
특수한 이익에 기초한 사고방식으로 나타난 것은 모두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반
하는 것은 모조리 부도덕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이러한 인식을 하나의 정의로 종합해보면 도덕이란 결국 각각의 특수한 계급이익
에 따라서 다양하게 변화하는 시대의 모든 삶의 이해관계에 기초를 둔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현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상의 것은 실로 법칙 그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제 우리들은 도덕률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인물이나 의회에 의해서, 예컨대 루
터나 루소, 칸트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군주나 도덕이라는 가면을 쓴 장로회, 제국의회에 의
해 제멋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인물이라든가 비
밀의회라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하느님의 계시라는 형태로 과장하여 공
표 하던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또 법률적으로 비준할 뿐이다. 그러므로 "루터 이래로", "루소
이래로", "칸트 이래로", "어떠어떠한 결의 이래로"라고 말하는 경우 세상사람들이 그 인물
이 공표한 것이나 의회가 비준한 것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인 경향의 출현 또는 시작을 발견
하는 한 그 견해는 올바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이지 결코 원인은 아니
다."
<--즉, 도덕률은 사회적인 경제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표면적인 모순이 있을지라도 일반적인 도덕률과 예의범절(관습) 사이에는 분명한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도덕률은 모든 계급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즉 "모든 계급의 이익을 초월하여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도덕의 원칙이 있다거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도덕의 표준이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류이다." "특정 계급의 특수한 도덕률은 계급연대나 계급차별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는 계급지배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며 따라서 그것은 대대로 내려오는 보도로서 항상 휘둘러지는 수단이다. 각 시대의 지배계급은 여타의 계급을 향해 자신들의 특수한 지배이익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의 일부를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라고 강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지배계급은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로서 이러한 것들의 표준을 제시했다. ... 지배계급은 다른 계급들을 육체적으로, 다시 말하면 사회적, 정치적으로 지배할 뿐만 아니라 언제나 정신적으로도 지배한다는 것, 따라서 지배계급은 모든 정신분야에서도 다른 계급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의견을 강요한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 예를 들면 어떤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아이들을 많이 가지는 것이 미풍양속으로 간주되고 영원불변의 고귀한 도덕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풍양속은 어떤 시대에는-그것도 그것이 널리 권장되던 시대에는 이상하게도 항상-노동력이나 병사, 납세자 등을 필요로 하는 지배계급에게만 가장 중요한 경제적 이익이 되었다. 물론 지배계급 자신들만은 아이들이 많아야 한다는 규칙에 별로 속박되지 않아도 좋았다. 지배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에 있어서만은 "아이들이 많다"는 것은 무례한 요구라는 식으로 뻔뻔스럽게 그것을 거부했다."<--동시대에도 적용가능할듯-->
# 성 모랄의 규칙이 성차별적인 이유
성 모랄의 규칙이 왜 남자와 여자에게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는가? 도 경제적인 원인-사유제산제-로 설명할 수 있다. 사유제산제를 토대로 일부일처제가 출현했으며 "역사에 있어서 계급차별의 최초의 형태"인 남녀계급차별이 나타난다. <--이에 관해서는 책 서두에서 설명했음: 사유재산의 적자상속을 위한 남성중심적 체제 확립--> 남녀의 불평등을 남녀 모두가 자연의 질서로 간주하고 사물의 당연한 상태로 간주해왔으며, "지배계급으로서의 "남자"가 사회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지배하고 있는, 즉 계급으로서의 "여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같이 여자들은 19세기 말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계급의식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후로 성 모랄의 남녀권리 차이에 대한 비판이 전개되었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이러한 비판에 반발하여 지금까지의 상태를 사물의 "자연스러운" 그리고 따라서 "영원불변의" 제도로 보는 남자가 많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여자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건은 바로 남자의 계급지배가 얼마나 튼튼한가를, 즉 남자의 계급지배가 지금도 그 근저에서부터 뒤집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는 끊임없이 변화해가고 발전해가며 또 경제조직이 변화해감에 따라 계급이익과 사회적 요구와 더불어 계급구성도 변화해가기 때문에 각 시대는 다른 도덕률을 받아들이고 다른 도덕의 표준을 요구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회의 변화는 성 모랄의 규칙을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변하지 않는 도덕관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성 모랄 변혁의 속도와 사회안정
<-- 현대사회의 성모랄이 급변하는 이유는?--> 사회 토대의 변혁이 근본적이고 혁명적일수록 공적인 도덕률의 변혁도 근본적이다. 생산관계의 변화 속도가 느린 과거에는 도덕률도 오랜 기간동안 동일했고 "풍기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5세기,18세기,19세기에서처럼 완전히 새로운 경제원칙이 등장한 시기에는 일체의 도덕률도 송두리째 변혁되었다. 또한 군주의 "씨받이 남자"와 같이 사회도덕의 표준에서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이런 개인적인 요구는 개인적인 사정이 사라지면 더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 도덕의 정반합<--조낸 헤겔주의자+유물론자-->
"도덕은 스스로가 시대의 커다란 경제적인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가는 동안에만, 즉 도덕이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해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는 동안에만 사회를 비옥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덕이 그러한 힘을 잃어버리고 사회의 진정한 삶의 이익에 배치된다면 그 도덕은 더 이상 사회를 개혁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꾸어 말하면 앞에서 역설한대로 경제, 즉 지금까지와는 다른 도덕률을 요구하는 생산의 발전에 어울리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드디어 사회발전의 지렛대 역할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이 모순된 상태는 역사에서 계속해서 유지되어 마침내 변화된 삶의 내용이 거대한 모순에 부딪히면 사회는 자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할 것을 강요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이 대립은 혁명기
에 달할 때까지 계속 역사 위에서 유지된다. 이 혁명기야말로 모든 시대에서 낡고 생명력이 없는 도덕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완전히 새로운 도덕이 탄생하는 시기라고는 할 수 없어도 점진적으로 요구되는 도덕의 필연성이 현실 속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법률상의 비준을 요구하는 시기이다. 이 혁명기를 계기로 하여 똑같은 상황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 가르쳐주는 모습이다. 나의 견해는 사회에서의 이상적인 도덕의 힘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 힘을 올바른 길로 되돌려 놓는 것일 뿐이다."
# 도덕과 계급의 관계
<--지배계급의 도덕 강제와 이중성의 모순-->
특정 계급의 지배체제가 유지되면서 지배계급은 그들의 도덕관을 다른 계급에게 강요하는데, "특정한 도덕관을 방어하는 것이 계급지배에는 매우 중요한 지배의 무기가 되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안정적이 된 경제적 방법을 대표하고 있는") 보수계급은 (경제적으로) 변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수정을 거절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그러한 것은 결국 다른 계급을 위한 것이며 이론적으로만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보수계급도 개인적으로는 변화된 사회적 조건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역사발전에서 생긴 거의 대부분의 수확의 달콤한 즙을 빨아먹는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그 필연적인 결과로서 마침내 특정한 발전단계에서는 역사의 상황여하에 따라 어떤 때는 위선적으로 또 어떤 때는 노골적인 철면피로 변하는 이중의 토대를 가진 유명한 도덕이 발행한다. 위선의 경우에 해당되는 고전적이 실례는 19세기 영국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점잔빼는 신사숙녀들의 유형을 공공도덕의 모범으로까지 치켜세웠다."
국가와 사회에서 권력이 독점적인가 덜 독점적인가에 따라서 지배계급의 태도는 다르게 나타난다. 이에 해당하는 두 가지 예를 비교해보면, "18세기의 프랑스에서와 같이 19세기 영국에서도 불로소득으로 얻은 거대한 부가 결국 이 육욕적인 방탕의 토대였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이 부는 어디까지나 거짓으로 얼버무린 위선이라는 외피를 걸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사회의 토대는 가장 발달된 근대적 입헌정체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대중의 감시와 비판이 충분히 보장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앙시앵 레짐의 프랑스는 그 토대가 영국과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토대는 극단적인 절대주의였기 때문에 일체의 진보적인 감시나 공개적인 비판은 허용되지 않고 있었다. 한편 부르조아 계급은 겨우 그 맹아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었을 뿐이기 때문에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은폐를 위한 외피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적 덕성을 닥치는 대로 짓밟아버렸던 특수이익, 점점 새롭고도 파격적인 향락생활만을 추구하려고 했던 특수이익은 대중의 면전에서 노골적으로 설쳐댔고 스스럼없는 뻔뻔스러움도 제멋이었다."
<--도덕과 계급의식, 그리고 계급투쟁-->
특수한 계급도덕은 "계급연대"의 중요한 수단으로 계급 내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계급도덕은 새로운 계급의 탄생과 함께 형성되고 발전하는데, "계급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느끼기 시작하고 특수한 이익을 깨달아 마침내는 스스로의 특수한 요구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단계"에서 "계급의식"에 눈뜨게 되며 "일반적인 도덕의 표준"과 "계급도덕"이 구별된다.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이 발전하면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새롭게 탄생한 계급이 계급의식을 갖게 되면 다른 모든 계급에 대해 의식적인 대립을 시작하며 그들의 특수한 이익을 주장하고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자신들이 그 자리에 앉으려고 투쟁을 시작한다.
그래서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도덕의 향상의 원인이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새로 발돋움하는 계급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는 한 그들의 계급의식에 대한 자각은 자신의 도덕뿐만 아니라 모든 계급, 나아가서는 지배계급의 도덕까지도 훌륭하게 향상시킨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계급동료들의 도덕수준을 한층 높은 단계로 향상시키게 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즉 신흥계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들을 억압하고 또 지배하는 계급이 대표하는 지배의 정당성을 부도덕한 것으로-물론 이것은 성 모랄에만 한정되지 않고 도덕 일반도 포함된다-의식하고 이러한 시각에서 지배계급을 비판하고 공격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들이 주장하는 모든 요구는 정의라고 주장한다."
"신흥계급은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계급의 지배를 부도덕한 지배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의 요구를 정의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적 행위에서까지도 진정한 도덕을 대표하려고 한다. 그 결과 신흥계급은 자신들로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청렴결백이야말로 최고의 조건이라고 모두에게 시위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의 도덕은 신흥계급에 의해 향상되어왔다. 실례로 "근대 부르주아의 해방시대를 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17세기의 영국과 18세기의 프랑스, 19세기의 독일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사멸해 가는 봉건제도와 싸웠던 시민계급이 매우 높은 도덕성을 대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신흥계급이 성 분야에서도 예컨대 금욕을 신봉하고 자유분방한 연애의 모든 형태를 엄금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부르주아 계급은 그 해방시대에서는 분명히 결혼과 가족에 대해 근엄한 의견을 선양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견 가운데는 한층 향상된 도덕성이 일부 정확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흥계급이 사회에서 한층 향상된 도덕을 대표하는 것은 이 하나의 이유, 즉 자신의 진영에서 자기자신에 대한 교육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 즉 신흥계급에서는 항상 어떤 사회적 요구를 극히 대담하게 선언한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도덕활동이라는 것은 결국 언제나 사회의 경제적인 토대의 반영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회의 재구성의 중심이 된 계급은 성행동에 있어서도 그 시대의 최고의 발전단계로서의 도덕의 필연적인 가장 진보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신흥계급은 소위 고급 빵가루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다른 계급보다-더 영리함과 동시에- 더 도덕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논리가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즉 역사적인 논리에 최후의 결정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도덕적이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이유가 하나가 되어 신흥계급의 특수한 도덕을,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사회의 전체 도덕의 진보를 위한 지렛대로 만들었다."
4) 미래의 전망->부터 읽을 것
3. 색의 시대-역사와 본질
앙시앙 레짐, 즉 프랑스 대혁명 이전 절대주의 왕정 하의 쾌락주의 사회는 소수의 집권계층이 다른 계층을 착취하여 누린 것. "인류 전체로 볼 때, 인간은 오늘날까지 아직 한 번도 지상의 파라다이스, 곧 낙원 따위를 산책한 적이 없으며 낙원에서 추방된 일도 없고 낙원을 잃어버린 적도 없다. 낙원의 문은 아직도 인류에게는 닫혀져 있다."
"만약 우리가 문명의 비극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면, 신들의 황혼은 인류에게는 어떻게 해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류의 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자랑스러운 확신을 모토로 내걸어야 한다. 그에 반해서 절대주의 시대는 인류가 이를 악물지 않으면 안되었던 가장 비참한 비극의 시대였다."
1) 중앙집권의 발달
"존재현상은 항상 행동으로 시작된다. 역사에서 그 행동은 곧 혁명이다. 이것은 세계사의 모든 계급운동에도 적용된다. 계급운동이 역사에 등장할 때는 항상 혁명적이다. 그것은 역사의 낡은 조직을 무덤으로 보내고 모든 것이 변혁된 내용에 걸맞는 정치형태를 지배적 위치에 앉히는 혁명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것이 역사에서의 혁명적인 것의 본질과 작용이다. 계급운동이 처음에는 혁명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것이 마지막에 화석화해서 유기적으로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대신에 그 지배가 시작되는 날로부터 유기적인 모든 발전에서 가로막는 최대의 제동장치로 바뀌더라도 이 논리는 언제나 진실이다."
절대주의 왕권도 혁명적으로 시작한 것, 신대륙 발견과 해외무역<--이라고 하지만..사실은 착취잖아. 어쩔수없는 유럽인 -_-;-->으로 상업이 발전하면서 상인들의 이익이 자치도시를 넘어 민족국가로 확대되며 이들의 이익을 보장하기에 가장 적합한 정치제도가 강력한 절대군주의 중앙집권체계로 요구되었다.
# 절대주의의 형성과정
"어느 나라도 절대주의라는 정치적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 자본주의단계로 바로 건너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a) 스페인
"이러한 역사의 필연성은 가장 빨리 스페인에서 나타나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유럽의 어떤 지역보다도 앞서 뚜렷한 절대주의적인 문화가 생겼다. 스페인의 풍속과 에티켓이 맨 먼저 유럽의 궁정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b) 프랑스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스페인의 그것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100년이나 뒤의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의 지배와 중앙집권의 안정은 이미 1615년, 곧 루이 13세가 즉위한 해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세계 무대에서 세계 제패에 실패한 스페인의 쇠사슬을 끊은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지배권을 공인 받게 되었다."
c) 독일
"독일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30년 전쟁(1618-1648)의 비참한 결과의 하나였다. 30 년 전쟁에서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원조를 받은 독일의 제후와 자유도시(Reichsstadt)가 요구하는 자주독립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주장하는 구교를 기초로 했던 독일제국 사상을 이겼던 것이다. 그 결과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 의해 모든 제후들, 모든 자유도시들-이른바 신성 로마제국 직속의 자유도시들-은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좋았고 또 멋대로 다른 제후나 왕국과 동맹해도 괜찮게 되었다. 그 동맹은 형식적으로는-그러나 그 형식은 무시되었다-황제나 제국을 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30년 전쟁의 독일의 비극은 그 조약의 결과로 확실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구화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30년 전쟁 속에서 비참한 독일의 소국가분립주의를 대표하는 "초라한 굴뚝새의 둥지를 제거하고" 독일국민을 위한 신성 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합스부르크가의 교황적인 세계제패의 최후의 시도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일을 부흥으로 이끌고 자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시도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은 그렇게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독일의 소국가 분립주의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역시 그 소국가들의 비참한 경제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30년 전쟁이 끝나자 동시에 합스부르크가, 곧 스페인 절대주의가 프랑스를 상대로 자웅을 겨눈 세계제패전에서도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프랑스의 화폐는 독일에서 큰손을 흔들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 100년도 더 넘게 독일의 수백의 크고 작은 궁정의 텅 빈 돈주머니는 프랑스의 뇌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선 제후의 궁정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 프루츠가 갖가지 문서들에 의해서 증명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곧 왕자, 왕세자, 모든 대신들로부터 가장 급이 낮은 시종에 이르기까지-이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대신에 현금 대가를 간단히 받아들였다. 현금이 너무나 노골적인 느낌이 들 경우는 훌륭한 말, 값비싼 의상, 호화로운 은제식기 세트, 그것들에 필적하는 탐나는 물품들을 받았다. 공공연하게 선언된 영구적인 부패가 30년 전쟁의 유산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100년 동안 외국의 이권을 보장하는 노리개가 되었고 독일의 적은 보호의 미명하에서 독일 제후들의 영구적인 매국행위에 마수를 뻗쳤다."
"독재적인 절대군주제를 향한 역사적 발전은 독일에서도 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장애물에 의해서는 막을 수 없는 것이 자명했다. 다만 독일은 한 사람의 군주 대신에 200명의 절대군주를 받들게 되었다. 독일국민은 200이나 되는 궁정의 탐욕스런 일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 절대주의를 지속시킨 역사의 법칙
절대주의 시대의 특징은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정의로운 국가권력이 행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어떤 절대군주도 "사회적 왕권"에 관한 사명을 느낀 일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특수 이익밖에는 몰랐다. 만약 군주가 민족국가의 제도적 발전을 꾀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본가의 돈주머니를 능란하게 털기 위해서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도였을 뿐이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보호는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즉 절대주의는 일반적으로 경제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층계급의 민중은 봉건주의의 비참한 착취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는 착취의 화신으로까지 보인다." (카우츠키, <1789년 이전의 계급대립>)"
절대주의는 지배적인 성향을 가진 한 군주 개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다. 루이1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예를 통해 비교해보면, 루이14세는 지배적인 절대군주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있었고 독일의 프리드리히2세의 경우 이와 반대의 인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 프리드리히 2세는 융커들이 바라는 일, 융커들에게 새로운 권리와 이권을 보장하는 일밖에 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봉건적인 토대 위에서 성장한 군국주의라는 철제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러워지고 이젠 몸에도 맞지 않는 철제 셔츠를 벗어버릴 뜻도 기력도 없었다." 절대주의는 역사적인 흐름과 사회경제적인 요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융커:독일의 귀족 대지주-->
2) 절대주의의 비용
# 절대주의의 잔인성
절대주의의 계급운동은 세계사의 다른 운동이 일어난 혁명기와는 달리 '영웅시대'가 없었다. 절대주의는 청년들의 이상적인 투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사용한 방법은 언제나 몹시 야만적이고 또 참으로 조잡한 것이었다. 반대파가 무력하게 자신의 손에 넘어오면 그만큼 절대주의의 강압은 언제나 더욱 심각했고 그때의 야만성은 또 그만큼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절대주의는 그들에 반대한 모든 저항을 짓밟고 잔인하게 보복했다. 그 사례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자면,
독일의 제후들이 농민전쟁에 패배한 무기도 없는 농민들을 살해한 경우, "항복한 뮌스터의 재세례교파 교도들의 인육에 군침을 흘렸다는 저 맹수와 같은 잔학성...그것은 마치 발광한 맹수가 사냥감을 막다른 곳에 몰았던 순간, 저 베르제르커와 같은 분노였다."<--조사해볼것: 뮌스터 재세례교파, 베르제르커-->
프랑스에서의 위그노 교도(16 세기 프랑스 신교도)에 대한 박해 사건도 같은 예이다. 이는 다른 종교전쟁이 그렇듯 순수한 종교전쟁이 아니라 군주적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절대적 중앙집권으로부터 귀족계급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카톨릭 귀족들은 절대주의에 패배했고 잔인한 복수를 당했다. 영국 청교도와 칼빈교도의 투쟁도 역시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부르조아계급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다. 청교도 역시 중앙집권에 패배했고 "영국에서도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야수적인 보복방법이 구사되었다. 그 당시 자기의 권리를 지키는 계급을 레블(rebel)이라고 불렀는데, 지주들이 레블 곧 모반자를 격파했을 때 "그들은 희생자의 몸뚱이에서 창자를 잘라내어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그들의 원한을 풀면서 즐거워했다."
그 외의 자유국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알렉산더 6세(재위 1492-1503. 스페인의 보르지아 집안 출신. 매수정책에 의해 교황이 됨. 사보나롤라를 처형함. 그는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보호함. 그가 그의 사생아 체자레를 조카[nepos]라고 속인 뒤 중용 함으로써
nepotism 이라는 말이 생김/역주)가 막판에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어 마침내 경쟁상대인 추기경 로베레를 굴복시켰을 때 그것은 한 인물이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의 세계제패정책이 프랑스의 세계제패정책을 누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실의 이해관계가 교황권에 대한 두 사람의 입후보자를 통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콘클라베(Konklave :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의 비밀회의/역주)에서의 결정적인 순간에 양파의 승패는 벌써 끝나 있었다. 이전에는 빈번하게 매수가 행해졌으나 이번에는 매수 말고도 독약과 비수로 경쟁이 계속되었다. 보르지아 집안의 독약의 속담에 등장할 정도인 것이다. 보르지아 집안 사람에게 매수된 자객들은 비수나 대검을 손에 들고 맹렬하게 암약했다. 그들의 승리는 말할 것도 없이 스페인의 절대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그 뒤에 추기경 로베레(율리우스 2세. 재위 1503-13. 교황권 강화에 노력하고 프랑스, 독일과 캉브레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의 세력이 증대하자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반 프랑스적이 됨.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보호함/역주)가 마침내 교황의 자리에 앉았을 때 세상이 그에게 "흡혈귀"라는 별명을 붙이게까지 한 그의 참혹한 수법은 기독교라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에 중앙집권의 토대를 강화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후계권이 메디치 집안(곧 레오 10세/역주)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만사는 각본 그대로 진행되었다. 곧 메디치 집안은 당시 피렌체 시민헌법의 마지막 보루를 그들이 대표하는 절대주의를 위해서 폐지하려고 어김없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절대주의의 게급차별
"절대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진정한 승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주의의 역사에서는 어디에서나 우선 타협이 먼저였다. 루이 14 세 시대의 앙시앵 레짐조차도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정신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귀족계급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인민계급(Volksklassen, 곧 classes peoples), 곧 부르조아 계급도 포함된 평민(roture)을 허접쓰레기처럼 경멸한 것이었다. 상인, 노동자, 농민은 지배계급의 눈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였다.
절대주의시대가 되자 사람은 남작 이상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생겼다. 그런 이유에서 절대군주는 귀족계급에만 둘러싸였고 그들만을 접견했고 그들에게만 여러 가지 권리를 주었다. "군주의 절대권력은 인민, 곧 부르조아와 농민만을 그리고 고위 승려계급을 포함한 귀족계급의 경우는 각각의 개인만을 대상으로 했고 신분으로서의 귀족계급은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왕국은 왕의 영지였으나 거기서 나오는 수입은 귀족계급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했다. 농민과 상공인은 귀족계급을 위해 일하고 상비군은 귀족계급을 위해 싸우며 국가의 관료와 수입은 귀족계급을 위해 존재했다"(칼 후고)."
# 절대왕권의 신격화
"절대군주는 유아독존하여 지상의 최고존재로 승격했다. 그는 "vin Gottes Gnaden! (신의 은총에 의하여!)"이 되었다. 그의 지배는 국민의 지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절대주의의 모범소년인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은 "군주는 살아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다. 그런데 신은 나쁜 일에는 직접 손을 대지는 않으나, 독자들도 눈치채고 있듯이, 악마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키는 법이다.
..."국왕의 의지는 최고의 법률이다"가 생겨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설이; 되어 모든 사람의 머리를 지배했고 수백 년에 걸쳐서 큰 소리로는 반대할 수 없는 명백한 신앙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인의 즐거움이니까"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물리쳤다."
"신은 군주가 되어 지상을 걸어다녔다. 절대군주는 바로 살아 있는 신이었다. 따라서 두려움이 앞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신의 걸음걸이였으며, 또 아무나 호흡할 수 없는 다른 분위기가 살아 있는 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
절대군주는 국가를 지배하려 하는 여러 세력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허울뿐인 전지전능함에 의해서 자신이 당연히 살아 있는 신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곧 절대군주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신이 여러 가지 일을 명령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환자의 몸에 손을 얹어 그의 병과 불구를 치료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환자를 진짜로 낫게 했다. 신앙심이 그러한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 절대주의 왕권에 봉사한 예술
"회화에서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고대 희랍에서 따온 장면, 곧 신들의 생활이 정해진 소재였다. 그것은 군주의 생활이며 군주의 지배의 신격화라고 할 수 있다. 쥬피터나 마르스는 군주의 얼굴 모습을 했고 비너스나 쥬노는 왕비를 쏙 빼놓았다. 희랍 신화는 미술에 의해서 왕실의 역사와 군주의 생활의 역사로 바뀌었다. 왕실의 승리는 군주의 승리였다. ...
어떤 인간도 관념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세계에서도 절대군주의 머리 위에 설 수는 없었다. 건축에서 절대주의 미술양식의 최후의 발전단계인 로코코 양식의 궁전은 언제나 단층구조였다. 어떤 인간도 군주 위에 서서는 안 되었으며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었고 또 군주의 머리 위에서 걷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와 신의 관념을 지상에 옮긴 것이었다."
# 절대왕정의 사치와 낭비
"왕국은 군주의 개인 소유물이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도 "국왕은 프랑스의 모든 재산과 토지에 대해서 실질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가?"는 문제가 여러 차례 진지하게 토론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이 언제나 그 놀라운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14세가 세자를 위해 만들도록 한 훈령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과인의 국가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법률적으로는 과인의 소유물이다. 너희 국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민들의 훌륭한 관리인으로서 과인의 국가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언제라도 충당하기 위해서 승속의 소유를 불문하고 일체의 재산을 자유롭게 쓰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
절대군주는 국토의 모든 재산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으므로 그는 모든 조세수입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사치를 위해서 조세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하는 것도 절대주의의 논리로 보면 당연했다. 절대군주는 자기의 변덕스런 사치를 위해서 그가 써도 좋은 금액을 초과하는 일 따위는 물론 계산에 넣지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적자가 생기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국민이었다. 엉망진창의 낭비는 거의 모든 절대주의의 궁정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프랑스는 국가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적자에 이르자 대신까지 완전히 두손을 들었다. 그러나 루이 16 세는 왕비를 위해서 거금 1, 500 만 리브르로 성 크루 성을, 자기를 위해서는 1, 400만 리브르로 랑비에 성을 사들였다. 하룻밤의 도박을 위해 10 만이나 20 만 리브르의 돈을 뿌리는 일은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러시아의 에카테리아 2 세는 그녀의 왕성한 색욕을 채우기 위해 무려 9 천만 루블을 썼다. 그러나 그 엄청난 금액도 루이 15 세가 정부들에게 마구 뿌린 돈에 비하면 하잘 것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녹원(鹿苑)이라고 불린 베르사이유 궁전의 하렘에 있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 사들인 물품의 값만 해도 수억 리브르나 되었다. 그 금액 가운데는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 넬 자매, 듀바리 부인에게 들어간 방대한 액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네 잎 클로버 가운데 하나인 퐁파두르를 위해서만 국고로부터 수천만 리브르의 거금을 인출했다. 루이 14 세의 비공식적인 첩 관계도 결코 값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 든 것은 루이 14 세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신으로 받들어진 자신을 위해서 훌륭한 궁전을 가지고 싶었고 그 때문에 1년 동안(1685년) 에 9 천만 프랑의 돈을 쏟아 부었다."
프랑스 외에도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태양왕 루이14세의 사례를 모방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건축열 때문에 단기간에 무려 천수백만금을 썼다. 그것은 7년전쟁(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 1756-63/역주)의 가공할 궁핍의 시대로서는 -이 시기는 바로 이 고통의 시대의 뒤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궁핍한 프로이센 인들에게는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 절대왕정 하의 학문
"퇴물이 된 총희들은 대개 많은 연금과 은사품을 받는 대신 사랑의 하사는 보통 단념했다. 루이 14세의 첩이었던 감상적인 라발리에르 양의 뒷자리를 물려받은 몽테스팡은 10년 동안에 걸친 충실한 사랑의 봉사에 대한 위자료로서 매월 1000루이도르(20프랑짜리 금화/역주)의 은급을 받았다. "그 총희 하나에게 프랑스는 유럽과 프랑스 왕국에 있는 학자 전체 급료의 3배나 되는 돈을 주었다"고 그 무렵의 한 저술가가 개탄을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절대주의 시대에 학문이 얼마나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 절대주의 왕정의 국민착취와 부정부패
a) 전제적인 세법
"절대주의가 그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긁어들이기 위해 어느 나라에서나 취한 첫째 수법은 참으로 전제적인 세법이었다. 아무것에나 세금을 부과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조세를 만들어냈다. 세수입을 확보하고 그 위에 세금의 징수업무를 모면하기 위한 꽤 천재적인 방법이 프랑스에서는 페르미에 제네랄 이라고 불린 진세 청부인 제도에 의해 성공했다. 그 제도는 궁정이 신임하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에게 그들이 국왕의 금고에 납입해야 할 일정한 금액이 청부되었다."
b) 관직매매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현금을 매개로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날 로마 교황청이 고위의 사제직을 입찰에 붙여 팔아 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벌이가 좋은 관직이 매매 대상이 되었다."
c) 도시자치권의 몰수
"군주는 도시로부터 자치권을 거두어가 버렸다. 도시가 빼앗긴 자치권을 많은 돈을 지불하고 되사지 않는 경우에는 도시의 공직이나 명예직은 일방적으로 국가의 관직이나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그 경우에도 그것들은 도시주민의 비용에 의해 유지되었고, 더구나 국가는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수수료를 받아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d) 화폐 재주조
"일확천금을 꿈꾸는 콜룸부스의 달걀을 절대주의는 화폐 모양을 바꾸어 재주조하는 수법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탈러, 굴덴, 그로센의 크기를 줄이기만 하면 되었다. 옛 화폐 한 개로 같은 액면의 새 화폐를 몇 개나 주조해 낼 수 있었다. 무일푼이 하룻밤 동안에 재산가인 크뢰수스(옛날 소아시아에 있었던 리디아의 마지막 왕,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임금이었다/역주)가 되는 데는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화폐 경제가 등장한 무렵부터 일치감치 생각해 낸 그 방법이 되풀이해서 악용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 때까지 은화의 액면 표시가 원래 표시의 250배로, 금화의 액면표시는 원래 표시의 150배가되었다. 그럴 때 어떤 방법이 잘 사용되었는가는 국고에 5천만 리브르 이상을 불로소득한 1709년의 프랑스의 대대적인 "개주"와 새로운 "정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군주가 그들의 지독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그런 간악한 타개책을 생각해 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된다. 그 방면에서 가장 악독하고 또 잘 이용된 수법은 세금, 보증금, 예금과 같은 국고에 납입되는 돈은 양화로 요구하고 국가의 지출이나 봉급은 악화로 내주는 방법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등은 아주 능란한 재정의 명수로서 그런 방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e) 강제공출
"이 방법에 의해서도 낭비로 인한 적자를 보충할 수 없을 때는 대개의 군주는 공공연하게 강도로 돌변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689년에 프랑스 정부는 17세기 후반기에 유행했던 은제집기를 모
두 왕실조폐국에 공출하도록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f) 식량독점
"민중의 궁핍을 이용하여 한목 벌려는 것도 번번이 사용된 수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근이 들 때마다 의례 곡물투기군이 큰돈을 벌었다. 왜냐하면 매점 조합을 조직하여 모든 곡물을 시장으로부터 거두어들이게 됨으로서 기근이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회에 루이 15세는 이른바 "기근에 불을 지르는 도당"과 한패가 되어 폭리를 취하는 곡물 상인으로부터 개평을 떼어 자신의 금고에 막대한 돈을 끌어들였다. 루이 15세가 곡물매점조합인 말리세(Malisset)의 두목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신하의 인명부에는 버젓이 "전하의 곡물매점"을 전담하기 위한 회계과장이었다.오를레앙 공작 부인(엘리자베트 샤를로테/역주)이 루이 15세의 첩 맹트농에 관해서 "전하는 물론 늙은 첩까지 그 해의 농사가 흉년으로 보이면 재빨리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곡물을 매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여자는 참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국민은 굶주림으로 마구 죽어갔습니다"라고 말한 그대로의 사실이 벌어졌다. ...국민이 영원히 식량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상황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절대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의 가장 큰 행복은 신이 내린 국왕의 행복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g) 인신매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결국 큰 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 벌이었다. 세금, 매관매직, 독점등에 의해 국민을 착취하는 수법은 큰 나라에서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작은 나라에서는 그 한계가 더욱 뚜렷했었다. 프랑스 태양왕의 궁정을 흉내내려는 약소국의 절대군주들은 그들의 전제적인 손아귀 속에 있는 국민의 힘을 짜내기 위해 특수한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럴 경우 가장 수지 맞는 방법은 인신매매, 곧 전쟁중인 다른 나라의 군대에, 특히 네덜란드나 영국군대에 자기 나라 사람을 팔아 넘기는 것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나 영국은 잔혹한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인적 자원이 필요했는데, 자국의 국민만으로는 그 수요를 다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자기 나라 군대를 그 나라의 전선에 보내는 것인데 자기 나라에 묶어 두는 일 보다도 더욱 야비한 짓이었다. ... 자기 나라의 인민을 팔아 넘기는 수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소국의 군주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재정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파는 일은 독일의 약소국 절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기반의 하나였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76년부터 1782년까지 영국에 5,723명의 인간을 팔아 넘겼다.(영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이 필요했다/역주). 그 때의 조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총 4,300명의 보병과 경기병을 언제라도 영국정부에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영국의 급료를 받고 있는 동안은 보상비를 계약에 서명한 날로부터 계산해서 1년마다 64,500 독일 탈러씩 증액하기로 약속했다. 또 군대가 영국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으면 그날로부터 보상비를 두 배로, 곧 129,000 탈러로 증액하며 두 배로 증가된 보상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독일로 귀환한 뒤에도 향후 2년동안 계속해서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영국으로부터 병사 1인당 1년에 30 탈러의 징발 자금을 받았으며, 전사자 1인당 40 탈러의 보상금과 부상자 3인당 같은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로로 팔린 사람들 가운데 1783년에 무사 귀국한 사람은 2,708명이었다. 그 숫자를 5,723명에서 빼면 3,015명이 없어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그 3,015명이 모두 전사한 것은 아니고 "그 일부분은 가엽게도 미국에서 거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레싱의 고귀한 패트론(페르디난트는 만년에 학자와 예술가를 보호했다/역주)은 병사들 가운데 전상을 입거나 불구가 된 자들은 미국에 버려 두고 귀국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팔아먹은 인간이라는 상품에 대해 영국이 지불하는 피의 급료를 챙기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교활한 재정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 불행한 인간들에게서 3중의 이윤을 긁어냈다. 첫째로 병사들의 건강한 육체를 팔아 넘김으로써, 둘째로 병사들의 부상한 육체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셋째로 불구폐질자가 된 병사들을 외국에서 거지 노릇이나 하게 해서 그들에게 지불해야할 수당을 절약함으로써 였다. 그가 그러한 놀라운 "재정개혁"에 의해 500만 탈러 이상의 현금을 자기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메링, 레싱의 전설). ..
뷔르템베르크 공작<--칼 오이겐 공작-->도 매우 악독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혈육까지 아프리카의 살인은행에 팔아 넘겼다. 그는 장기간에 걸쳐 네덜란드의 화폐와 이해관계를 위해 일한 살인은행의 가장 큰 어용 상인이었다.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많은 첩의 자식들에게 모조리 프랑크몽(Franquemont)이란 성을 붙였는데, 네덜란드와의 계약에 의해 그가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파견한 각종 군대 가운데는 그의 아들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물론 뷔르템베르크 공작이라는 인신매매자는 자기의 아들들을 농민의 자식들과 같이 값싼 계약조건으로 팔지는 않았다. 그런 상품이나 희생자는 그 값이 훨씬 높았다. 그 아들들은 장교감이었던 것이다. 곧 장교의 경우에는 그 계급에 상응해서 보통 군인에게 지불되는 금액의 3배 이상으로 계약되었다.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 간 프랑크몽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첫째 프랑크몽은 사막에서 쇠약해진 나머지 객사했다. 둘째 프랑크몽인 프리드리히는 온갖 고초를 겪다가 13년만에 겨우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팔아 넘긴 가엾은 자식들 가운데 다시 조국의 땅을 밟은 몇 명 안 되는 자식 중 하나였다. 살아남았지만, 귀국 도중에 탈주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던 아들들은 거의 바타비아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거기서 흑사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파렴치한 인신매매를 비판할 경우, 특히 외국에 팔아 넘긴 군대 중에서 자발적으로 아프리카행 군인모집에 응한 자원병은 거의 없었다는 주위의 사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는 강제로 군대에 징발되었던 것이다. 병역의무가 있는 장정이라고 해서 간단히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서인도의 노예상인이 검둥이 상품을 조달하던 식으로 사냥된 사람들도 있었다.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들이 한창 밭일을 하던 중에, 밤중에 잠자리에서, 또 술에 취해 있을 때에 강제로 끌려갔다. 일단 군주의 재산으로 편입된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 큰자식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아버지가 있는 수많은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공포와 불안 때문에 밤에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절대군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약소 군주들이 행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이러한 "재정개혁"의 모든 수법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h) 출판 검열 통제
"절대권력의 소유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일도 역시 큰 범죄가 되었다. 비판은 곧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를 저지를 자는 종신금고형이라는 비교적 그 당시로서는 관대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정치범은 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대중에게 호소해야 비로소 정치범이 되었다. 군주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따위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엉뚱한 유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것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아주 합리적인 대항수단을 취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하고 재빠른 예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죽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국의 군주들이 유령퇴치를 위해 동원한 무서운 수단은 검열이라는 것이었다. 절대주의의 손에 의해 검열이 모범적으로 시행된 결과, 민중이 접근할 수 있는 책이란 카톨릭 국가에서는 성도전 뿐이었다."
"정통파라는 것은 카톨릭교의 삭발머리에 걸치든 프로테스탄트의 법복에 걸치든 참으로 단단한 것이었다. 제주이트회의 수도사는 "천국에 가려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포로가 된 이성을 가져야 한다" 고 가르쳤다. 여기서 말하는 "포로가 된 이성"이란 현상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학문은 화석화하거나 까다로운 형식주의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따라서 가장 밑바닥의 인민계급에게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소름끼치는 무지와 끝없는 미신이 만연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통파에 의해서 억압되고 봉쇄된 대중은 될대로 되라는 체념에 짓눌려 있었다. ...
30년 전쟁 뒤에도 절대주의가 취한 수법들은 물론 어디서나 국민의 마음에서 그 무서운 악목을 씻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씻어주기는커녕 그 수법은 오히려 그 무서운 악몽을 미리 속에 목 박아 버렸다. 그 결과 100년 이사 독일의 인민은 언젠가 한번은 이 세상에 아름다운 여명이 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은 탄식의 골짜기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 곳곳에 진을 친 종교단체, 곧 형제교단이나 자매교단의 대두는 사회에 팽배한 절망감의 반영이었다."
# 절대주의 시대의 특권계층
"부르조아 계급, 귀족계급, 승려계급 가운데서도 겨우 한줌밖에 되지 않는 자들만이 그러한 낭비를 즐길 수 있었고 또 즐겼다. 앙시앵 레짐의 주요 계급인 이 세 계급은 그 각 계급의 내부에서도 역시 격차가 심각했다. 세 계급가운데 한줌밖에 안 되는 자들만이 언제나 절대주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 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귀족계급의 가구수는 많아야 3만이었고 그 총 인구는 14만 명 정도였다. 그 귀족계급 가운데서도 자신의 봉건적인 기존직업을 버리고 자진해서 궁정귀족으로 변신한 자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
부르조아 계급의 경우에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류는 가장 위에 위치한 그야말로 한줌에 지나지 않는 계층, 곧 금융세력의 대표들뿐이었다. 산업자본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나 턱걸이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양식은 아직 소규모생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 귀족계급은 소비생활과 사치에 돈을 물쓰는 듯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그 부류들과 적어도 대등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점은 절대주의의 사고방식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금융조작에 의해서 방대한 부가 부르조아 계급의 금융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밖에도 원시축적의 시대에는 개같이 쓰는 것이 언제나 부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때문에 부르조아 계급은 언제나 여봐란 듯이 사치에 파묻힌 생활을 했으며, 특히 귀족계급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기를 썼다."
"이 한줌의 온갖 광태, 어이없는 변덕, 일시적인 기분에 탐닉하기 위해서는 전체 인구의 95%가 굶어 죽든가 그렇지 않으면 빈곤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그날 그날을 지내야 했다. 거기에 절대주의의 가장 심각한 그리고 진정한 비극이 있었다. 기생계급은 인간의 존엄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전대주의는 모순이나 반항에 부딪치지도 않고 얼마나 쉽게 그 야수성을 발휘했던가?"
# 절대주의의 종말
"요약하면 이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곧 절대주의의 역사는 유럽 문명의 거대한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길이 대부분의 인민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역사의 필연성이었다는 것은 그런 대로 위안을 준다. 그리고 첫째, 절대주의시대의 지배적인 현상은 현대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둘째, 뿌리째 변혁된 역사단계에 의해서 절대주의적 재배를 일시적으로라도 부흥시키려는 시도 따위는 장래의 어떤 시대에도 다시는 부활되지 않을 과거의 꿈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 마지막으로 절대주의의 힘이 그토록 가공할 야수성을 발휘하게 된 토대, 또 그 역사적 현상이 어느 나라에서나 야수성을 띠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곧 권력을 손에 넣었을때의 야만성 그리고 한번 손에 넣은 권력을 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똑같은 박자로 남용하려고 했던 수법은 여;r시 앞에서도 말했듯이 절대주의라는 역사적 존재의 특수한 전제에 바탕하고 있다. 절대주의의 대두는 순전히 역사의 필연성이었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성립은 역사의 획을 긋는 진보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절대주의는 유기적인 조직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단계와 연결되는 정치형태가 되지 못했다. 생산단계와 연결된 정치형태만이 유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는 일시적인 정치적 기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육체에 파고든 기생충이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의 혁명기에조차 지배적 현상이었다. 절대주의는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발흥하는 부르조아 계급과 몰락하는 봉건주의의 불가피했던 계급투쟁에서 생긴 어떤 정치적인 기회, 곧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서로 다투는 두 계급 사이의 상대적인 진공상태를 교묘하게 자기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이용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제3제였다. 그런데 그 운 좋은 제3자는 아무래도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죽은 자의 몫을 차지할 수 없었다. 군주가 하나의 계급이 되어 다른 계급을 견제하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즉각적인 야만스런 폭력을 선동했고 그와 같은 원인에 의해서 차례차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이 만들어져 나갔다. 그 상태는 신흥계급-부르조아 계급-이 절대적으로 강력하게 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결국 신흥계급은 그 기생충의 폐해를 막고 그것을 자기 몸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현상고착의 외피는 변화해가는 내용을 이미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제거하는 작업은 영국에서는 1649년의 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1789년의 대혁명으로 이루어졌다."
# 유럽 각국 절대주의의 차이
각국의 경제적인 기반에 따라 절대주의의 형태는 차이가 보인다. "그 차이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차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밝히고, 특히 그 차이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국의 문화수준의 큰 차이, 곧 프랑스 절대주의문화가 왜 모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압도하고 전 유럽의 동경의 표적이 되었는가, 지역적 개념에 불과했던 독일이지만, 북부독일과 중부독일이 왜 그처럼 크게 달랐는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a) 스페인
"절대주의는 스페인에서 첫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스페인은 다른 나라에 비해 거의 100년이나 앞서 특수한 절대주의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절대주의는 절대 접근 불가능을 첫째의 특징으로 하는 권위적인 형태였다. 그러한 형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스페인에서 절대군주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권위에 대한 관념은 항상 가장 높은 곳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것이 그 뒤의 모든 시대에 모범이 되었다."
b) 프랑스
"17세기 말경이 되면 어느 나라에서나 프랑스의 절대주의형태가 스페인의 절대주의형태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프랑스 풍의 에티켓과 풍속이 모범이 되었다. 스페인은 파산해서 세계를 제패했던 지위도 잃게되어 프랑스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모든 방면에서 스페인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이 시작한 것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시켰으며 그 이래로 프랑스 궁정의 방식들이 유럽에서 줄고 큰 영향력을 미쳤다. ...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첫째, 경제적 토대가 절대주의를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정치권력의 집중화가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파리로 말하더라도 그곳-파리에는 중앙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은 어떤 측면에서도 인공적으로 무리하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우선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파리는 일찍부터 국제무역의 교차점이 됨으로써 자연히 절대주의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프랑스 절대주의는 물질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풍족했다. 파리 이외의 그 어디도 절대주의가 그처럼 활수한 고객이었던 곳은 없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든 생활-곧 파리의 방대한 인구의 생활-이 절대주의의 이해관계와 일치하고 절대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곳도 없었다. 그러므로 절대주의의 이론적 체계화도 파리에서 첫 고고지성을 울렸고 절대주의의 최고의 예술적 승화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로코코라는 예술양식에 의해 이룩되었다."
c) 독일
"독일을 역사에서 후퇴시킨 가장 큰 원인은 이미 16세기초에 나타났다. 곧 동인도항로의 발견으로 15세기 말부터 무역로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번영은 생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대부분이 중개무역, 곧 거간으로서의 활동-독일은 거대한 국제무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에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역로가 바뀌자 독일의 경제적 발전은 곧 장애에 부딪쳤고 이제까지 내 세상을 구가하던 독일의 부자들도 하룻함 사이에 가난뱅이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대변동은 30년 전쟁에 의해서-곧 그 전쟁이 독일에 지운 부담이나 독일의 숙명적인 정치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국분립주의의 영구화에 의해서 더욱 복잡한 것이 되었다. 더구나 그 전쟁은 독일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의 중앙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저지했고 그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든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부르조아아적 국가 혁명에 실패하고 역사의 낙오자가 되었다. 영국이 일찌기 1649년에, 프랑스가 1789년에 돌입한 혁명의 도정에 독일이 발을 내디딘 것은 겨우 1848년이었고 그나마도 어중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전혀 독일이 유기적인 발전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자연히 절대주의시대의 독일은 불행한 특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특수성은 첫째, 독일은 1600년부터 1760년까지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 그 시대의 하층계급은 독일의 어느 나라에서도 자발적인 역사의 담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 셋째, 독일에서의 혁명적 부르조아의 에너지는 아주 뒤늦게 폭발했다는 것, 넷째, 독일인의 노예근성은, 독일인의 전형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속담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독일의 걸인경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돌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곧 독일군주들의 가문의 야만성은 아주 특수한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불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주의시대에 군주가 되었던 독일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야만적이었음은 그 당시에 이미 뜻 있는 사람들을 전율케 한 사실이었다. ...
"독일의 군주들은 인민의 노동의 결정을 갉아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피를 빨아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역사의 책임이 문제가 된다. 그 누가 독일의 작은 나라들의 군주가 되었더라도 그 역시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백성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일이 자기의 가장 큰 재원이 되며, 백성을 날마다 배반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기반을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던 절대주의시대의 한줌 군주계급은 어디로 보나 도덕주의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주계급 그 차체가 바로 악의 학교였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전체가 꼭 같은 모습이라곤 할 수 없다. ... 작센은 독일의 다른 나라들, 특히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마치프랑스가 독일 전체에 대해서 가진 것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작센은 은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세 말기부터 독일의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풍요하고 번영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 은광 덕에 베틴 가는 미술이나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환경이 좋은 온상을 마련해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찌감치 16세기에 작센에는 절대주의문화가 크게 발달했고, 예를 들면 독일 미술의 최초의 세속적 화가 루카스 크라나하 2세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크라나하처럼 근대적으로, 곧 "세속적으로" 여자의 육체를 그린 화가는 독일 르네상스의 미술계에서는 그가 유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독일에는 제2의 크라나하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진 토양이 작센 이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작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일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자들이 멕시코의 은광을 대대적으로 채굴하게 되고 그 때문에 작센의 광산업이 궁지에 몰렸을 때도 작센의 문화는 그 은광 덕택에 여전히 이제까지의 우월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작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도시조직으로서는 파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제적 발전의 유기적인 산물이었다. 두 도시는 17세기와 18세기에 파리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의 독일문화의 최고 수준에 있었다. 드레이덴은 독일이 그 시대에 낳은 최고의 예술문화를 대표했고 라이프치히는 "당대의 독일세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세계"를 보여주었다. 드레이덴과 라이프치히는 누구나 알아주는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였다. 라이프치히에서는 위대한 요한 세바스티안 바하가 거의 30년 동안이나 합창 지휘자로서 활약했고, 레싱이나 괴테도 일찍이 라이프치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했고 그들의 천재를 가장 높이 발휘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작센의 각 대학들에서 독일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고고지성을 울렸다.
d) 영국
"영국은 아주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아주 짧게 그것도 특수한 절대주의시대를 겪었다. 그 절대주의시대는 영국대혁명 이후 겨우30년 동안 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 시대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로 불렸는데, 찰스 2세가 그 대표였다. ... 찰스2세도 역시 프랑스의 태양왕을 그의 빛나는 모범으로 삼았고 그 모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승리를 뜻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특수한 영국적 양상은 그 짧은 기간에 뻗어나아갈 수가 없었고, 따라서 프랑스 문화도 대륙에서 모든 나라를 프랑스화한 것처럼 영국문화를 프랑스화할 수는 없었다. 그럿은 1649년의 혁명이 너무나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절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타협이라는 것이 프랑스 이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왕정복고 기간 중에도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절대 주의를 강력하게 견제했고 마지막으로 제임즈 2세의 짧은 지배가 끝난 뒤 그들에게 한푼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군주제와의 거래를 재빨리 끊어버렸다. 이어서 18세기에 들어서자 인도라는 보고에서 부진장한 부가 런던으로 흘러들어왔고 그 덕택으로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가 되자 그들은 재빨리 프랑스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은 일찍부터 그들을 자주독립적인 방향으로 교육시켰고 그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절대주의문화의 식탁에 초대된 적은 있었으나 결코 프랑스에 굴복한 일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현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은 프랑스 문화를 그들 마음대로 그로테스크하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프랑스 문화는 영국에서 도리어 억압되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조아 국가는 문화에서도 재빠르게 완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부르조아 국가와 더불어 순수한 부르조아 문화도 탄생되었다. 확실히 부르조아 문화는 불사조처럼 절대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약무인한 어릿광대처럼 세계의 무대로 뛰쳐나왔다. 그 어릿광대는 옛 세계를 향해 으스대며 "나는 만장하신 여러분의 상속인입니다" 라고 외치기 위해 온 세계의 문화를 끌어모아 자기의 의상을 스스로 지어 입는 장난을 해왔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