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비가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이라고 쓰고 나서 흥얼흥얼거리는데 허밍으로 따라부르기도 쉽지 않은 노래군요. 정말 심수봉언니 노래 잘 해요. 나는 박정희 죽고 나서 태어난지라 어린시절 심언니의 모습을 테레비에서 보지 못했어요. 나에게 음치유전자를 전해주신 어머니 역시 심수봉의 노래를 따라부르거나 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으셨어요. 그래서 열여섯살인가 되어서야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었지요. 여튼.

그 사람은 말이 없는 타입은 아니구요, 반대로 아주 아주 아주 말이 많은 쪽. 왜 문자메세지 보낼때에 꼭 사십글자를 꽉 채워서 띄어쓰기도 없이 빡빡하게 보내는 사람 있잖아요. 그런 사람이었어요. 만나서 이야기해본 건 딱 한번이었지만 그때도 그랬어요. 아주 말 많았어요.

비오는 날에는 우울해지잖아요. 소주 생각나고 사람 그립고. 나는 그랬어요. 요즘은 그냥 혼자 맥주 마시면서 고전시트콤-프렌즈 같은 걸 첫시즌부터 잠올때까지 내리보는 방법을 택하는데 그때는 그러질 못했어요. 우울하지 않은 척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채팅을 했죠. 수다스럽게 계속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그 사람 사는 동네로 가기로 했어요.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었지만 비오면 날이 더 어둡잖아요. 지하철에서 내려서 어두운 비내리는 길을 걷는데 그 사람이 나타났어요.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용모를 가진 남자가 말이에요. 하지만.

원래 기대라는 건 그렇잖아요. 기대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그건 기대가 아니라 예상하는 거죠. 나는 남자의 키나 몸무게나 옷차림 같은 걸 만나보기 전부터 예상할 수 있을만큼 대단한 예지력을 가진 여자도 아니구요. 어쨌든. 그 사람이 거기 있었으니까 그리고 비는 내리고 날은 추웠으니까 그 사람을 꼭 끌어안고 길을 걸었어요.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한 편이었는데 팔은 아주 희고 부드러웠어요. 보송보송하고 말랑말랑한 하얀 팔뚝을 끌어안고 걸으니까 제법 기분좋대요. 부드럽고 따듯했어요.

솔직히 다 지난 일이니까 솔직히. 내가 솔직해져도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 그 사람이 못생겼다는 게 고마웠어요. 왜냐면 적어도 나를 거부하지는 않을 거란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딱 외모만 기준으로 봤을때 적어도 내가 부족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때는 그게 너무 다행스럽고 고마웠어요. 오만한 안도감이 들었어요. 왜. 왜 그랬을까요. 나도 외로웠고 그사람도 외로웠는데. 왜 그런 근거없는 자신감이 생겼을까요.

나는 무슨 클레오파트라나 되는 것처럼 오만 섹시한척은 다하면서 그사람을 유혹했어요. 그사람은 다 받아주고 심지어는 공주처럼 떠받들어 줬구요. 그의 오피스텔로 가는 길에 나한테 뭐라그랬는지 알아요. 당신이 머물기엔 너무 누추한 곳이에요. 이런 말 하면서 택시 타고 근처의 깨끗한 숙박업소로 가자는 거에요. 그때는 말 못했는데 너무 황송하고 고마웠어요. 덕분에 나 얼마나 행복해졌는지 몰라요. 그때 고집부리지 말고 그냥 모텔갈걸.

그 사람의 누추한 오피스텔에서 그는 발기하지 않았고 나는 젖지 않았어요. 우리는 막연한 의무감으로 열심히 서로를 애무했어요. 하지만 아프기만했고 조금도 흥분하지 않는 거에요. 그 사람도 마찬가지였구. 삼십여분동안 서로의 몸을 더듬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어요. 그 사람 살찐편이었는데 뚱뚱한 남자가 팔베개 해주는 거 좋더라구요. 푹신한 감촉이 근육이랑 달라요. 진짜, 나 살찐남자랑 사귀어본 적 없는데 그때 알았어요. 너무 좋아. 그래요, 이거 접선자랑 하는 거에요. 여러분, 너무나도 행복한 밤이었답니다.

아침이 되자 그의 말대로 누추한 방이 눈에 들어왔고 정말로 그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어요. 그 사람 말이 맞았어요. 그 방은 누가 머물기에도 너무 누추한 곳이었어요. 차라리 길거리에서 자는 게 낫겠다 싶을만큼 지저분한 혼란의 소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내 집으로 도망친 건 정말 그 방이 너무 지저분했기 때문이에요. 지난밤 그사람이 발기하지 않아서 또는 내가 흥분하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구요. 그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못해줬어요. 그냥 도망쳤어요.

그사람이 문자메세지를 몇번인가 보냈어요. 한페이지 꼭 채워서 구구절절. 근데 그 여백없음이 무서웠어요. 그때 나는 정말 여유가 없었거든요. 마음 편하게 하룻밤 누워잘 수 있게 부드러운 팔 빌려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도 할수가 없었어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랬어요. 그사람이 나한테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그냥 내가 겁먹었던 것 뿐이에요. 그래서 미안해요.

젊은 사람들은 미래를 이야기하고 늙은 사람들은 과거를 이야기한다는데 갑자기 확 늙어버린 기분이에요. 오늘은 비도 안 오는데 그냥 그 사람이 생각나네요. 갑자기 소주도 생각나고 말이죠. 지루한 이야기 끝까지 들어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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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나무 | 2007/01/25 01:42 | 일궈낸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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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ueilove at 2007/01/25 09:43
아.. 여기(샌프란시스코)는 날씨가 너무 좋아서 흐믓해하고 있는데.. 문득 이 글을 읽고 나니깐... 비가 시원하게 좀 내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나네요..
Commented at 2007/01/26 11:1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7/01/29 20:57
아흥; 사실 여기도 비는 안 왔지만 소주생각이 간절한 밤입니다.
쿠에이님, 비공개님 잘 지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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