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말청초의 지식인, 포송령과 진홍수.

진홍수(陳洪綬), [화은거십육관책(畵隱居十六觀冊)] 中 3폭
비단에 담채, 21.4x29.8cm., 대북고궁박물원 소장.,


포송령의 [요재지이]를 읽으면서 화가 진홍수가 생각났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

그들이 살았던 명말청초는 왕조가 바뀌는 정치적 혼란기였으며, 한족이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배계층인 만주족-여진족-에 의해 주류에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던 박탈의 시기였다. 명조가 멸망하고 청조가 들어서자 새로운 사상과 예술이 펼쳐졌다. 성리학과 양명학의 시대는 가고 고증학의 시대가 왔으며, 정통 문인화로 이어져 내려온 화단에 양주팔괴의 신선한 화풍이 펼쳐졌다.

급격하게 변화했던 명말청초 시대는 후대의 역사가들이 보기에는 변혁의 시기라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혼돈의 시기였을 것이다.

문인 포송령은 명조가 망하고 관직길이 막히자 과거를 포기하고 칩거하며, 세속의 기이한 이야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사람-남자를 홀리는 여우 이야기, 기상천외한 재주를 가진 사람들 이야기, 신비로운 도사와 영약 등에 관한 이야기다. 이 기묘한 이야기책은 아주 인기가 있어 여러 판본으로 제작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요재지이]는 포송령의 기담집 제목이고 8권으로 전권이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중국고전 답지않게 아주 술술 읽힌다. 역시 이야기의 힘, 물론 번역도 좋다. 미주도 충실하게 달려있는데 굳이 찾아가며 읽지 않더라도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번역자 김혜경에게 박수쳐주고 싶다.

참고로 요재는 포송령의 호가 아니라 그가 이 책을 집필했던 서재의 이름이라고 한다. 평생에 걸쳐 흥미로운 이야기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서설을 다는 작업을 해왔음에도, 문인이 세속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이 못내 부끄러웠던지, 책 제목에 자신의 호를 붙이지는 않았다.

화가 진홍수 역시 명 말의 인물로, 여러차례 과거에 낙방했던 전력이 있다. 결국 왕조가 망해 관직길이 막히자, 그는 그림을 팔며 살아갔다.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통속소설의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판화로 제작된 이야기그림은 지금 보아도 재미있다. 화폭에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복고풍이면서도 이전의 어느 대가와도 비교할 수 없는 기괴한 느낌을 준다. 많은 공을 들여 그린 세밀한 선이 주는 전체적인 느낌은 그로테스크하다. (중국미술사 시간에 '진홍수, 변형주의자' 라고 외웠던 기억도 난다.-_-;)

아래의 그림 속 인물, 도연명 역시 관직을 버리고 한적한 생활을 했던 귀거래사, 귀향한 뒤에는 술을 마시며 거문고를 뜯는 음주가무의 생활을 즐겼다고 하는데, 아무리 가난해도 국화를 감상하는 것이 바로 문인의 자세인 것이다.

비록 통속적인 이야기를 수집해 팔아서 살아갈지라도, 판매하기 위한 그림을 그리며 살아갈지라도, 그들의 작품에서는 세속의 표면 아래 감춰진 고통과 좌절과 욕망이 남아있는 듯 하다.

진홍수(陳洪綬), [도연명도(陶淵明圖)],
비단에 비단에 담채, 30.3x307cm, 호놀룰루아카데미미술관 소장.
(책에 수록된 도판을 디카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orz)


진홍수의 그림도 올렸으니, 포송령의 글도 소개해야 할 듯 싶어 [요재지이]에 수록된 이야기 중 한 편을 골랐다. 이 이야기를 고른 까닭은 아주 짧기 때문이다. 절대 음담패설에 가깝기 때문이 아니다. (믿어주세요 +ㅂ+)

이야기 자체의 재미도 있지만 이 이야기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도 중요할 것 같다. 이런 세속의 기담, 저잣거리에서 시민들이 시시덕거리며 주고받았던 이야기에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기록했다는 사실 말이다.

복호(伏虎)-여우퇴치

(전략) 나와 동향이었던 아무개 서생은 평소 양물이 큰 것으로 유명했는데, 자기 평생 한번도 흡족한 적이 없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어느날 밤 그는 사방에 인가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외진 여관에 묵게 되었다. 문득 한 여자가 나타나더니 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어느새 방안까지 들어와있었다. 서생은 그녀가 여우임을 짐작했지만 그래도 기쁘게 맞아들여 함꼐 잠자리에 들었다. 바지끈을 풀자마자 그는 바쁘게 진격해 들어갔다. 여우는 놀랍고 아파서 깨갱 하고 우는 소리를 내더니, 매가 사냥감을 덮치듯 느닷없이 창문을 뚫고 달아났다. 서생은 여우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창밖을 내다보며 달콤하고 느끼하게 교성을 질렀다. 하지만 여우는 이미 사라져 보이지 않았고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이 서생은 정말 여우 퇴치의 맹장이로다! '여우를 물리쳐 드립니다'라는 방문을 내걸고 직업으로 삼아도 괜찮을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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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나무 | 2007/07/03 00:59 | 그림과글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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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7/07/03 07:4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7/07/04 11:59
캬캬캬캬~~ 탈모! 탈모! 탈모교를 믿으면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 고뇌번민 수심고난 회한미련이 사라지리라.
문제는 머리카락과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 -_-;
(근데 기왕이면 어린 남자와 함께... ㅎㅎ)
Commented by 아니마 at 2007/07/07 09:50
역시 가운뎃다리가 제일 무서운거다.....
Commented by StarLArk at 2007/07/10 16:34
전희가 부족해서 여자가 도망갔단 일화가 요괴퇴치 전설로...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7/07/10 23:52
아니마. 그럼그럼. 그것이 살인무기. -_-;;

StarLArk. 세속의 기담이란 그런 식으로 변형되기 마련인가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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