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진보, 또는 문명과 폭력.

1.

진시황은 자신의 사후세계를 준비하기 위해 대규모의 병마용갱을 만들었다. 기록을 찾아보지는 않았지만 그 규모를 보면 그 무덤을 채우기 위해 무수히 많은 도공과 장인, 차출당한 농민들이 희생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진시황은 산 사람을 생매장하는 순장을 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나름대로 진보한다.

2.

분서갱유로 수많은 지식인이 죽었고 수많은 책들이 학살당했다. 그 목적은 중국 문자의 통일, 지식체계의 통합이었다. 고고학 발굴작업으로 강서성과 사천성 등 한족의 입장에서는 변방인 지역에서 현재로서는 해독불가능한 문자들의 존재가 드러났는데 아마 분서갱유로 사라진 문자는 이보다 다양했을 것이다. 분서갱유는 분명 중화사상에 입각한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문자와 지식과 사상의 통합작업이었다.

하지만 이때 채택된 한자가 이후로 동아시아 전역의 공용어로 사용되었다. 덕분에 역사는 진보했다.

3.

진나라의 시황제는 폭군의 대명사로 통하지만 그에 대한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는 생각에서 써보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야합으로 태어난 장사치의 아들인 비천한 황제다. 공자도 늙은 아비와 비천한 처자가 야합해서 태어난 사생아라는 이유로 조소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단명한 제국의 시황제가 중국 내에서 다른 이미지로 보여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상나라의 점술사들은 거북껍질과 짐승뼈에 점을 쳐서 미래를 전망했는데 그들이 알고자 했던 미래는 다방면에 걸쳐있었다. 국가나 부족 간 분쟁의 해결방법부터 왕의 치통을 낫게 하는 제사방법까지. 왕의 치통을 덜기 위해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내고, 왕이 사망하면 주변 귀족들은 물론이고 엄청난 수의 전쟁포로의 머리와 손발을 잘라 함께 묻었던 그들을, 중국의 사학자들은 한족 문명의 정수로 추앙한다.

진나라와 상나라의 두 경우만 놓고 보았을 때, 어느쪽이 더 문명적이고 어느쪽이 더 폭력적이라고 말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4.

역사는 문명과 폭력으로 이루어진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문명은 폭력의 다른 이름이다. 폭력이 없이 이루어진 문명은 없고, 문명이 없이 유지된 폭력은 없다.

'역사의 진보'라는 우스꽝스러운 단어를 피치 못해 쓰긴 했지만 사실 역사는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같지 않다. 다만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학자와 철학자들이 있었을 뿐이다.

5.

토니 블레어 총리가 이라크에 영국군을 파병한 덕분에, 전쟁에 회의를 느낀 포병장교 제임스 블런트가 가수로 전업해 가슴을 울리는 명곡을 만들었다. 전쟁이 음악을 진보시켰다는 안 웃긴 농담이다.

웃길 자신은 없지만 개인사에 얽힌 농담 하나 더. 천구백구십사년도에 커트 코베인이 권총으로 머리에 구멍을 내버리고 삼년뒤에 제프 버클리가 미시시피 강에 몸을 던지지만 않았다면, 내가 마릴린 맨슨이나 글렌 벤튼 따위에 미쳐서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by 작나무 | 2007/07/17 06:35 | 토해낸글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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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kueilove at 2007/07/18 11:48
아 디어사이드! 최고죠 +_+
Commented by 아니마 at 2007/07/19 10:28
1. 도용 만들기에 징집돼서 부역하던 농민들 중에
'차라리 생매장이 낫다'하고 뇌까렸을 사람은 없었으려나...?(갑자기 엄한 태클을;)

5. 60년대 팝계만 봐도 정말...+_+ ㅠ
이 때가 아마도 서구 대중음악 역사상 전무후무한 시기일 것 같아요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7/07/20 10:11
kueilove 님. 앗, 그렇습니까;; 저는 어느 순간 안티 글렌으로 탈바꿈해버려서..

아니마양~. 뭐,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말한 사람은 분명 있겠지만... 생매장은 좀 아니잖아 ㅠ ㅠ?

요새는 예전의 음반들-20세기 중후반의 음반들만 듣고 있는데, 내가 나이를 먹어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일 여력이 안 되는 건지 의심스럽기는 하더라. 근데 문화의 어떤 장르든 황금기라고 부를 수 있는, 창조력이 폭발하는 시기가 있잖아. 정말 그런지도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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