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 환한 얼굴로 달려와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도 괜찮겠느냐는 예의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필리핀으로 여행을 했다가 태국으로 넘어와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 우리라고 말했다. 처음 이십여분간은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서 흥분했나보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들어주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난 뒤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고문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필리핀 여행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게다가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노트북을 켜고 마주앉아 원고마감 하루 전의 스릴을 즐기며 자판을 두들기던 참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무례하게도 그가 하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키보드를 눌렀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대놓고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싶지 않다는 기색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무관심에 무관심했다.
그의 여행내용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가 특별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전혀 계획에 없는 트레킹이나 바이크 일주 같은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흥미롭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행담은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섹스모험으로 충만한 여행이 아니라, 필리핀의 값싼 여자들을 구매한 이야기.
2.
곰은 탈진한 표정으로 멍하게 맥주를 들이켰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언제쯤 그의 이야기를 자르고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3초 이상 쉬지 않고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쏟아지는 말 틈의 공백을 간신히 포착해서, 배가 고프다는이야기를 하고,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곧있으면 식당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변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뒤따라갈게요"라는 말로 우리를 좌절시켰다.
우리는 숙소의 카페테리아에서 도망쳐 식당으로 이동해 밥을 먹으면서, 그가 식당에 나타나기 전에 음식을 해치우고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끄고 커튼을 치고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음식은 한참 뒤에 나왔고 그는 너무 빨리 나타났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3.
그는 텔레토비 수준의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좋아좋아 싫어싫어" 외의 판단능력이 있는걸까 의심스러웠다. 텔레토비들은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데 이 사람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좋았던 것과 싫었던 것으로 구분해서 말했다. 그에게 좋았던 것은 섹스와 여자와 맛있는 음식, 싫었던 것은 술값이나 음식값이나 택시비나 화대에 대한 바가지.
그가 섹스나치라는 별명의 독일인과 함께 필리핀의 환락가를 누볐던 이야기 사이사이로 술과 음식과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졌다. 물론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변이나 자연의 풍경에 대한 묘사도 있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그곳에서 만난 여자가 등장하기 위한 배경설명에 불과했다.
그는 돈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정확하게 언급했다. 그날 먹었던 맛있는 음식의 값이 얼마였고 맥주는 한 병에 얼마니까 총합이 얼마였다는 이야기를 필리핀 페소화로 말하는 걸로 부족해서 한화로 대략 환전한 금액까지 덧붙였다.
실로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묘사한 "로컬 여자"들은 모두 '새까맣고 작달망하지만 사근사근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들이 실제로 어떠할런지는 아마 그 자신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들의 차이는 그저 열여섯살의 처녀이거나 스물다섯살의 노처녀이거나 서른 아홉살의 과부라는 정도. 역시 그는 숫자로 구분해서 말했다.
4.
"좋아좋아 싫어싫어" 수준의 지각능력은 불과 몇 시간 전 태국에서 있었던 오토바이 사고를 이야기할 때도 적용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타다가 외진 도로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사고가 나자 태국인들이 바로 물을 가져다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처치 수레(!)가 나타나 그를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태국의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는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돈 안 받더라."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응급조처를 해주고, 사고를 신고해주고, 망가진 오토바이를 트럭에 싣고 시내까지 와 준 사람들-그의 표현으로는 "로컬 피플"-에 대해 최소한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말이 언젠가는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는 심지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는 거듭해서 태국에서 빌린 오토바이의 부실한 제동장치를 탓했다.
5.
그는 Pattiya 라는 도시로 갈거라고 했다.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그 도시는 대규모의 환락단지라고 했다. 방콕 공항에서 택시기사에게 말했더니 1600바트를 달라고 했다는데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버스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그 도시를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가 태국에 온 이유는 그곳에 가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에게 값싸고 맛있는 음식은 그런 여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 이야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을 때도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가 쇠고기를 잘라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가 포크로 고기를 집을 때는 내 몸 어딘가에 날카로운 금속이 닿는듯한 느낌에 몸이 떨렸다. 그가 빠르게 음식을 씹어삼키는, 이야기를 하며 음식물을 씹고 숨을 쉬며 음식물을 삼키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이 막혔다.
하이데거는 동물에게는 세계 대신 환경이 있다고 말했는데, 동물은 환경에서 좋고 싫음을 느끼겠지만 인간은 세계성에서 도덕과 윤리를 깨닫는다는 것.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좋고 싫음만으로 세상을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색탐과 식탐만으로 가득한 空 - 어쨌든 그의 포식능력은 훌륭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20061209 기록.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 환한 얼굴로 달려와 자리에 앉았다. 옆에 앉아도 괜찮겠느냐는 예의상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외국에서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필리핀으로 여행을 했다가 태국으로 넘어와서 처음 만난 한국인이 우리라고 말했다. 처음 이십여분간은 오랜만에 한국인을 만나서 흥분했나보다 안쓰러운 마음으로 들어주었지만 어느 순간이 지난 뒤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고문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필리핀 여행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게다가 해야 할 일도 있었다. 카페테리아에서 노트북을 켜고 마주앉아 원고마감 하루 전의 스릴을 즐기며 자판을 두들기던 참이었다. 실제로 우리는 무례하게도 그가 하는 이야기를 흘려들으며 키보드를 눌렀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대놓고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싶지 않다는 기색을 내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무관심에 무관심했다.
그의 여행내용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가 특별한 여행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전혀 계획에 없는 트레킹이나 바이크 일주 같은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흥미롭게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여행담은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 낯선 사람과의 섹스모험으로 충만한 여행이 아니라, 필리핀의 값싼 여자들을 구매한 이야기.
2.
곰은 탈진한 표정으로 멍하게 맥주를 들이켰고 나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언제쯤 그의 이야기를 자르고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3초 이상 쉬지 않고 끝없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의 쏟아지는 말 틈의 공백을 간신히 포착해서, 배가 고프다는이야기를 하고, 그래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 곧있으면 식당이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변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뒤따라갈게요"라는 말로 우리를 좌절시켰다.
우리는 숙소의 카페테리아에서 도망쳐 식당으로 이동해 밥을 먹으면서, 그가 식당에 나타나기 전에 음식을 해치우고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불을 끄고 커튼을 치고 컴퓨터를 켜고 글을 쓰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음식은 한참 뒤에 나왔고 그는 너무 빨리 나타났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3.
그는 텔레토비 수준의 지각능력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좋아좋아 싫어싫어" 외의 판단능력이 있는걸까 의심스러웠다. 텔레토비들은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는데 이 사람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모든 일을 좋았던 것과 싫었던 것으로 구분해서 말했다. 그에게 좋았던 것은 섹스와 여자와 맛있는 음식, 싫었던 것은 술값이나 음식값이나 택시비나 화대에 대한 바가지.
그가 섹스나치라는 별명의 독일인과 함께 필리핀의 환락가를 누볐던 이야기 사이사이로 술과 음식과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졌다. 물론 그림같이 아름다운 해변이나 자연의 풍경에 대한 묘사도 있었으나 그런 이야기는 그곳에서 만난 여자가 등장하기 위한 배경설명에 불과했다.
그는 돈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정확하게 언급했다. 그날 먹었던 맛있는 음식의 값이 얼마였고 맥주는 한 병에 얼마니까 총합이 얼마였다는 이야기를 필리핀 페소화로 말하는 걸로 부족해서 한화로 대략 환전한 금액까지 덧붙였다.
실로 놀라운 기억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묘사한 "로컬 여자"들은 모두 '새까맣고 작달망하지만 사근사근하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들이 실제로 어떠할런지는 아마 그 자신도 모를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들의 차이는 그저 열여섯살의 처녀이거나 스물다섯살의 노처녀이거나 서른 아홉살의 과부라는 정도. 역시 그는 숫자로 구분해서 말했다.
4.
"좋아좋아 싫어싫어" 수준의 지각능력은 불과 몇 시간 전 태국에서 있었던 오토바이 사고를 이야기할 때도 적용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오토바이를 빌려 타다가 외진 도로에서 넘어졌다고 한다. 사고가 나자 태국인들이 바로 물을 가져다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급처치 수레(!)가 나타나 그를 치료해주었다고 한다.
태국의 응급의료체계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그는 이야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그런데 돈 안 받더라."
그에게 물을 가져다주고, 응급조처를 해주고, 사고를 신고해주고, 망가진 오토바이를 트럭에 싣고 시내까지 와 준 사람들-그의 표현으로는 "로컬 피플"-에 대해 최소한의 고마움을 표현하는 말이 언젠가는 그의 입에서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던 나는 심지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는 거듭해서 태국에서 빌린 오토바이의 부실한 제동장치를 탓했다.
5.
그는 Pattiya 라는 도시로 갈거라고 했다.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그 도시는 대규모의 환락단지라고 했다. 방콕 공항에서 택시기사에게 말했더니 1600바트를 달라고 했다는데 너무 비싼 것 같아서 버스로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가 그 도시를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그가 태국에 온 이유는 그곳에 가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에게 값싸고 맛있는 음식은 그런 여자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여자 이야기를 할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을 때도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그가 쇠고기를 잘라먹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가 포크로 고기를 집을 때는 내 몸 어딘가에 날카로운 금속이 닿는듯한 느낌에 몸이 떨렸다. 그가 빠르게 음식을 씹어삼키는, 이야기를 하며 음식물을 씹고 숨을 쉬며 음식물을 삼키는, 그 모습을 보며 숨이 막혔다.
하이데거는 동물에게는 세계 대신 환경이 있다고 말했는데, 동물은 환경에서 좋고 싫음을 느끼겠지만 인간은 세계성에서 도덕과 윤리를 깨닫는다는 것. 그는 자신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좋고 싫음만으로 세상을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색탐과 식탐만으로 가득한 空 - 어쨌든 그의 포식능력은 훌륭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
20061209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