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있기.

동거인이 떠나고 혼자 오 일을 보냈다. 그동안 미뤄놨던 집안일을 해치우고 대충 아무거나 주워먹은 뒤 이인용 침대를 마구 굴러다니며 잠을 잤다. 고양이 사진을 찍고 고양이 장난감을 만들어주고 고양이 생식을 연구하고 뭐 이런 일도 했고. 그리고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었다.

방드르디는 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뜻, 이 책은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의 이야기다. 디포의 소설에서 로빈슨 크루소가 문명으로 자연의 악조건을 극복하며 야만인 프라이데이를 교화했던 반면, 이 책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방드르디의 야만성에 동화되고 만다. 여튼

방드르디가 나타나기 전, 극도의 외로움 속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이렇게 표현했다.

불 꺼진 얼굴, 인간이라는 종족은 아직 한 번도 도달한 일이 없는 정도까지 불 꺼진 얼굴 (p110,민음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보았다. 그리고 얼굴에 남아있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월마트로 달려가 쇼핑을 했다. 세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매장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괜히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소다는 어디 있나요, 이 건전지와 이 것은 같은 제품인가요, 구에위안은 무엇인가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불길이 얼마나 살아났을지는 정말로 잘 모르겠다.

+ 그리고, 영화를 보았다. <나는 전설이다> 자막이 없는 채로 봤는데도 감정이입 싱크로율 백퍼센트, 동물과 대화하고 마네킹과 친한 척 하는 장면에선 눈물날뻔했다. 도시에 혼자 남겨진 인간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동료가 있는 좀비가 되는 게 나을지도 -_-; (그 이후의 전개는 시시했다. 텐과 윌스미스의 허리우드식 희생정신은 짜증날 정도. 소설은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소설에선 좀비가 아니라 흡혈귀였다)


by 작나무 | 2008/01/29 00:02 | 읽고쓰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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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아니마 at 2008/01/31 10:57
음-_- 전 <중경삼림>에서 걸레랑 친한척하고 비누와 대화하는 장면을 보며 다른 관객들이랑 같이 키키킥...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8/01/31 21:45
지금의 나는 다른 관객이 없다는 게 문제.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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