앓던 이 빠진 날.

1.
어제는 일찌감치, 그러니까 정오 이전에 일어나서 시장에 갔다왔다. 시장 가는 길에 이웃집에 들러 점심,이라고 하지만 첫끼니를 얻어먹고 작은 화분도 하나 얻었다. 시장에서 채소와 양념 따위를 커다란 비닐봉투 두 개에 나눠들고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니 벌써 세시, 채소를 손질하다보니 어느새 네시, 삼십분, 과외선생이 오기로 한 시간이라 야채 따위는 밀어놓았다.

2.
과외가 끝나고 본격적인 김장질에 들어갔다. 이번 김장의 계획은 여름이 올때까지 버틴다! (기왕이면 가을까지+ㅂ+) 그리하여 배추김치, 백김치, 깍두기, 파김치를 한통씩 담아놓으려는 생각이었다. 배추를 손질해서 절여놓고난 뒤 파를 다듬어서 양념을 버무리는데 문득 어디선가 예쁘게 매듭지어진 파김치를 본 기억이 나버린 거다. 리본모양으로 동그랗게 묶여서 가지런히 놓여있는 파김지... 하악하악.
파가 싱싱할 때는 제법 부피감이 있어서 몰랐는데 버무려서 절여기기 시작하니까 완전 흐물흐물... 밀폐용기에 끝도없이 들어가는 거다. 첨엔 한 단만 하려고 했는데 누르면 쑥쑥 들어가고 해서 한단 반, 두단까지 늘어나버렸다. 무수히 많은 파 줄기를 반디지하는 신공을 펼치느라 내가 파김치가 되어버렸다.
그 뒤는 근성으로 달리는 거다. 배추김치 양념을 만들려고 무채를 썰었다. 얼릉 채칼을 사야할텐데 투덜거리면서 무 한개를 산산조각 내놓고 난 뒤에 양념을 만들고 배추 속을 채우고 백김치 속도 채우고 액젓 안 들어간 국물도 만들고 깍두기용 무도 덤성덤성 썰어 재웠다가 과일을 주조로 한 양념을 만들어 버무리고... -_-;

3.
갑자기 이가 아팠다. 오른쪽 위 어금니의 뒷쪽, 그러니까 사랑니 자리. 그냥 아프기만 한 게 아니라 잇몸에서 뭔가 썩은듯한 냄새가 나고 억울하게도 그 역겨운 냄새를 오직 나만 맡고 괴로워해야 하고 잇몸은 욱씬욱씬 아프고 그 앞의 어금니들도 저릿저릿한 느낌이 들고...
김장하느라 그렇잖아도 떡실신이었는데 이놈의 사랑니가 문제였다. 어제까지 아무렇지 않았던 게 왜 갑자기 욱씬거리는 걸까, 단 하루만에 사랑니가 쑥 자란다는 게 말이 되나? 이 미친 사랑니, 사랑처럼 고통스러운데 사랑만큼 행복하진 않다는 게 문제.

4.
결국 밤을 새워서 김장을 마치고, 새벽에 잠들지 않은 채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치과 가기 전엔 이게 제일 중요함) 사랑니를 처리하고 피곤함을 벗삼아 마구 퍼져자겠다는 계획.
아침이 되어 지인들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했는데 한국병원을 추천하는 사람도 있고, 중국개인병원을 추천하는 사람도 있고, 종헙병원을 추천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기 와서 병원 개업한 한국인이 제대로된 면허가 있는지 사기꾼인지 누가 알아요. 일대에서 제일 좋은 치과에서 치료받는 게 낫지." 동포인 김언니의 말이 제일 합당하게 들려서 그 분이 붙여준 회사 직원을 따라 치과에 갔다.

5.
치과만 전문으로 오층짜리 건물에 뭐가 잔뜩 들어있는 거 첨 봤음. 치과 안에 그렇게 분과가 많은지도 몰랐고. 우앙. 중국에서 늘 규모에 놀라면서 이번에도 깜딱 놀라버렸다. 병원에 가보는 건 처음이라 제법 긴장했는데 예상 외로 불편한 점이 없었다. 어디나 병원 시스템은 비슷한 듯, 대형병원이니만큼 간호사샘들 정신없이 바쁘고 의사샘들 피곤에 쩔여있고 그런 분위기도 아주 익숙했고 말이다.
우리나라 치과에선 대개 각각 진료대 사이를 간이벽이나 커튼 같은 것으로 가려주는데 비해서 여기는 완전 개방형이었다. 복도와 진료실을 가르는 벽이 유리로 되어있어서 밖에서 안이 다 들여다보이고 내부에는 아무 칸막이 없이 진료대가 대여섯개 씩 배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느라 문도 거의 열어두어서 안의 소리도 다 들리고... 치과 기계소리 무셔웠어.
의새샘이 입 열어보고 엑스레이촬영하고 다시 의사샘한테 가서 마취하고 사랑니 발치. 무서웠던 일은 짧게 써야지.
아, 의사샘 상당히 귀여우셨음. 사실 외양은 빨간코에 모공 다 벌어져있고 피지가 막 샘솟아나오는 한마디로 피로로 피부가 썩어가는 상황이었지만 -ㅂ-;;  내가 한자를 얼추 읽고 이해하는데 중국어를 잘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길래 한국에서도 한자 쓴다고 했더니, 그런데 왜 중국어는 못알아듣냐고;;; 이건 뭐 병원에 감금되어 노동하느라 절대상식이 떨어지는 의사같은 반응... 당신이 더 신기해!
마취하는데 넘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면서 쪼끔 울었는데(;ㅅ;) 의사샘이 "부용하이파"(하이파 하지 말라귀)라고 하길래 "하이파셤머. 워부즈다오."(하이파가 머에요. 몰라효.)라고 답하는데 눈물이 줄줄... 뭔가 되게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 거 같자나. 그게 뭔데... 의사샘이 핀셋으로 엄청 큰 솜인지 거즈인지를 집더니 그걸로 눈물을 슥슥 닦아버리더라. -ㅂ-;; 치과에서 거즈로 눈물닦임 당해보긴 처음.
(집에와서 사전 찾아보니 害怕 [hài pà] 무서워하다. 그러니까 그냥 무서워하지 말라는 말이었음. -_-;;)
그렇게 해서 사랑니는 우지끈 소리와 뿌득뿌득 소리와 함께 뽑혔다. 우리나라에선 따로 부탁하지 않으면 발치한 이를 병원에서 처리하는 걸로 아는데 여기서는 솜에다 꽁꽁 싸에 손에 쥐어주더라. 나로서는 사랑니를 세번째로 발치하는 건데 지난 두번의 경험은 이를 부순 뒤 긁어내는 식의 수술이어서 온전한 사랑니의 모양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사랑니 크기가 제법 크고 예뻐서 이걸로 목걸이를 만들어볼까 생각했음.

6.
집에 와서 컴 앞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물고난 뒤에 <사랑니 발치 후 흡연>으로 검색해봤더니 후덜덜. 발치 후에 담배를 피우면 피가 안 굳는다는 이야기부터 구강암, 치암, 뭐 무서운 이야기 졸라 많더라. 제일 믿을만한 이유는 담배를 빠는 행위가 상처를 아무는데 방해가 된다는 내용, 같은 이유로 빨대로 뭔가 마시는 것도 좋지 않다더라. (대한치과교정학회 > 사랑니 >사랑니발치후)
그래도 한 모금 빨았다는 데 만족하고 바로 담배를 꺼버렸다. 피맛이 가득해서 담배맛도 별로였다능.
이것저것 검색하다 어떤 블로그에서 "마취가 풀리려면 2∼3시간이 걸립니다. 이때 뺨이나 입술, 혀 등을 깨물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라는 글을 보는 순간 혀를 깨물었다. 아놩.

7.
피가 멈출 때까지 두세시간 정도 지혈을 해주라고 했는데 지난 밤에 김장을 하고 밤을 꼬박 새운 뒤 발치를 당한 까닭으로 몸이 흐물거리더라. 꾸벅꾸벅 졸면 동거남이 버럭해서 깨워주고 그렇게 세번인가 한 뒤에 피가 멎고 잠을 잘 수 있었다.
힘들게 잠들었는데... 봄봄이 개냥이 새키가 자꾸 귀찮게 해서 방금 깼다. 피곤하군아.

by 작나무 | 2008/02/29 02:55 | 일상잡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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