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기들과 함께있는 장미는 마냥 행복해 보였다. 새끼들이 빈 젖을 물면 골골대며 좋아했고 부지런히 아기들을 핥아주었다.
그러나 고양이로서의 본성은 사람의 손을 탄 새끼들을 사람들이 아는 장소에서 키우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 장미는 새끼의목덜미를 물고 돌아다니며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장미는 거실 뒤편에 놓인 봄봄의 놀이상자를 선택했고 그곳에 가장 작은새끼 장자를 넣어놓았다. 장미는 새끼가 우는데도 들어가보지 않고 한참을 방치했고 그러는 동안 장자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다.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장자가 죽었다.
어쩌면 장미는 마취기운이 덜 풀린 상태라서 장자를 그곳에 두었다는 사실을기억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장미는 다른 새끼들도 모두 그곳으로 옮겨놓을 생각이었는데 거동이 불편해서 빠르게 움직이지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장 약한, 사망확률이 높은 새끼를 보살피는데 에너지를 투자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모를일이다. 자연계의 일을 사람의 감정으로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는 장미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 새끼들을 돌볼 수없다고 판단했고 장미를 격리시켰다.
그리하여 어미 없이 살게 된 갓난 아기들은 저희들끼리 포개져서 체온을 나누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부비며 지내게 되었다.




사람 손으로 분유를 먹이고 배변을 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마리 당 삼십분 이상, 아기들이 여럿이다보니 둘이 달라붙어도 두시간 이내로 끝나지 않는 중노동이었다. 이런 나날이 열흘째 되고 나서 고양이 대리부모인 작나무와 남자친구 곰 군은 절대적 수면부족과 스트레스로 실신직전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엄마의 빈 자리는 이다지도 컸단 말인가... 아이들의 엄마는 갔지만 아빠는 남았다. 그런데 아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된다.
생물학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한 개체가 후세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바로 존재의 목적이다. 따라서 발정으로 몸부림치는 고양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여 생물학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암컷과 수컷의 입장 차이가 생긴다. 암컷은 수태와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수컷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단순히 힘들지만 열심히 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인 것이다. 새끼를 임신한 채 죽을 수도 있고 새끼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고 새끼를 낳은 뒤 무리해서 먹잇감을 구하려다 죽을 수도 있으며 운좋게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암컷의 체력과 수명은 상당 부분 고갈된다.
그러나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위험부담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교미 도중에 사고를 당하거나 전염성 질병에 감염되는 가능성이 있을 뿐인데 이는 암수 공통으로 감수하는 위험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서 암컷과 수컷이 투자하는 에너지, 즉 부양투자의 측면에서 암컷이 수컷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그래서 암컷에게 수컷을 고를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렇다. 장미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염증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자기 새끼들을 돌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버지 봄봄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주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연필통을 쏟는다든가 격렬하게 스크래치를 해대는 한편 피곤에 쩔은 주인장이 한두시간 잠을 잘 때 울어대고 심지어 아기방 문 앞에서 사냥자세로 잠복하고 있질 않나... 이놈은 제 새끼들을 흥미로운 장난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곰 군: 뻐꾸기는 자기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잖아. 봄봄 이 자식은 뻐꾸기야. 애는 지가 만들어놓고 키우기는 우리가 하고!
작나무: 우리는 종달새일까 굴뚝새일까...(정체성에 혼란을 느낌)
곰 군: 내가 어쩌다 종달이가 됐지...(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이고 좌절)
작나무: 나는 굴뚝새 할게...(좌절 속에서 정체성을 인정하고 순응)
곰 군: 뻐꾸기는 알을 한 두개만 낳지. 대여섯마리 씩 낳아놓지는 않잖아.
작나무: 게다가 뻐꾸기 새끼라면 똥은 알아서 누겠지.
곰 군: 밥투정도 안 하고 주는대로 받아먹고!
작나무와 곰 군은 새만도 못한 신세와 뻐꾹이 봄봄을 원망하며 육아노동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어쩌면 좋은가, 이 뻐꾹냥이 새끼들이 이렇게 예쁜데...

엄마의 빈 자리는 이다지도 컸단 말인가... 아이들의 엄마는 갔지만 아빠는 남았다. 그런데 아빠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움은 커녕 방해만 된다.
생물학의 측면에서만 봤을 때 한 개체가 후세에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 바로 존재의 목적이다. 따라서 발정으로 몸부림치는 고양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여 생물학적인 성공을 거두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암컷과 수컷의 입장 차이가 생긴다. 암컷은 수태와 출산과 양육 과정에서 수컷보다 더 많은 노력을 쏟아야 한다. 단순히 힘들지만 열심히 한다는 수준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이 달려있는 문제인 것이다. 새끼를 임신한 채 죽을 수도 있고 새끼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고 새끼를 낳은 뒤 무리해서 먹잇감을 구하려다 죽을 수도 있으며 운좋게 살아난다고 하더라도 암컷의 체력과 수명은 상당 부분 고갈된다.
그러나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데 위험부담이 거의 없다. 기껏해야 교미 도중에 사고를 당하거나 전염성 질병에 감염되는 가능성이 있을 뿐인데 이는 암수 공통으로 감수하는 위험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서 암컷과 수컷이 투자하는 에너지, 즉 부양투자의 측면에서 암컷이 수컷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은 희생을 하고 있다.(그래서 암컷에게 수컷을 고를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렇다. 장미는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염증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자기 새끼들을 돌보려고 노력했으나 아버지 봄봄은 무엇을 하고있는가! 주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연필통을 쏟는다든가 격렬하게 스크래치를 해대는 한편 피곤에 쩔은 주인장이 한두시간 잠을 잘 때 울어대고 심지어 아기방 문 앞에서 사냥자세로 잠복하고 있질 않나... 이놈은 제 새끼들을 흥미로운 장난감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곰 군: 뻐꾸기는 자기 새끼를 남의 둥지에 낳잖아. 봄봄 이 자식은 뻐꾸기야. 애는 지가 만들어놓고 키우기는 우리가 하고!
작나무: 우리는 종달새일까 굴뚝새일까...(정체성에 혼란을 느낌)
곰 군: 내가 어쩌다 종달이가 됐지...(새로운 자아를 받아들이고 좌절)
작나무: 나는 굴뚝새 할게...(좌절 속에서 정체성을 인정하고 순응)
곰 군: 뻐꾸기는 알을 한 두개만 낳지. 대여섯마리 씩 낳아놓지는 않잖아.
작나무: 게다가 뻐꾸기 새끼라면 똥은 알아서 누겠지.
곰 군: 밥투정도 안 하고 주는대로 받아먹고!
작나무와 곰 군은 새만도 못한 신세와 뻐꾹이 봄봄을 원망하며 육아노동의 고통을 호소했다. 그런데 어쩌면 좋은가, 이 뻐꾹냥이 새끼들이 이렇게 예쁜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