썩은 사과와 엄마.

1.
오래된 이야기. 동생이랑 쓸데없는 주제로 굉장히 심각한 토론을 많이 했었는데 썩은 사과의 딜레마 라고 이름붙인 주제가 있다.

사과가 한 상자 가득 있는데 그 중에 일부는 멍이 들고 상해서 곧있으면 썩어서 먹지 못한다고 할 때, 싱싱한 사과와 상한 사과 중 어느쪽을 먼저 먹을것인가?

싱싱한 사과부터 골라 먹는다면 맛좋은 사과를 즐길 수 있지만 절반 정도의 사과는 다 썩어서 먹지 못하게 될 것이고, 조금 상했지만 아직 먹을 수 있는 사과부터 골라서 먹는다면 사과 전부를 먹을 수는 있지만 전부 다 맛없는 상태로 먹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식탁에 여러 반찬이 놓여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것부터 집어먹는가 가장 좋아하는 것을 남겨뒀다 식사를 즐겁게 마무리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단순한 미식이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인생관 전체를 대표할만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동생과 내가 토론을 하다 엄마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엄마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답했다.

"싱싱한 건 두고 먹고 곯은 사과는 잼 만들면 돼지."

와. 엄마는 대단해. 싱싱하든 상했든 사과는 그 나름대로 다 쓰임이 있는 거구나. 우리가 이 발상의 전환에 감탄하고 있는 동안 엄마가 비수같은 말을 추가하셨다.

"늬들은 살쪄서 잼 만들면 안되겠다."

커헉. 쉰이 넘은 나이에도 오오사이즈 입으면서 사사사이즈 입던 시절을 회상하는 우리 엄마는 잼을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우리는 사과 앞에서 그저 고민이나 해야 하는 뚱뚱한 청춘이었다. 흑흑.


2.
엄마 이야기 하나 더.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여튼 엄마의 생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완경(배려없는 말로는 폐경)을 맞으면서 엄마의 심리는 누구도 종잡을 수 없는 상태였는데, 어느날 엄마가 나를 불러다 앉혀놓고는 진지하게 물으시는 거였다.

너 요새 그거 얼마나 자주 하니?

들은 이야기로는 중년여성은 생리가 멈추면 호르몬의 불균형에 더해서 여자로서 인생이 종결된 것 같은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낀다고 하는데 울 엄마도 욕구불만 상태가 되어서 딸의 섹스라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걸로 대리만족을 느끼는 상황이 오신 걸까 싶었다.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미쿡이나 유럽도 아니고 남한인데 모녀가 앉아서 담백하게 섹스 이야기를 하는 건 좀 그렇잖나. 엄청 당황스러웠다.

이거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조금 과장 섞어서 육덕진 음담패설을 들려드릴까...

그러면 엄마가 질투하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으실까...

믿지는 않겠지만 처녀인 척 시치미 뗄까...

남자친구 없다고 둘러대면 어떨까...

오만가지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데, 엄마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결국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두번 정도.

어째서인지 엄마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심지어 엄마는 내 어깨를 토닥토닥 해주고 안아주는 시늉까지 하시더니 기쁜 표정으로 이러시는 거다.

거봐 니코틴 패치 효과 있지? 곧있으면 끊겠다!

그러니까 엄마가 말한 그거는 그게 아니라 담배였던 거다. 어쩐지 매우 죄송스러워져서. 그날밤엔 니코틴 패치를 붙이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밤엔 딸딸이도 치지 않았다.


by 작나무 | 2008/08/27 18:03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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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i_jin at 2008/08/27 18:51
어머니의 재치에 박수를~!!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8/08/28 13:45
짝짝짝~!
Commented by 늑대별 at 2008/08/27 22:09
작나무님의 글솜씨는 어머니께 물려 받은 것 같기도 하군요...^^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8/08/28 13:45
그런가요. ㅎㅎ;;
Commented by 핏빛고양이 at 2008/09/05 15:4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나 완전 웃어버렸어 최곤데 ㅋㅋㅋㅋㅋㅋ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8/09/05 19:00
울 엄마가 좀 짱이심.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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