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사람.

타고난 근시였다. 열살부터 스물두살까지 안경을 수십개는 해먹었고 소프트렌즈와 하드렌즈도 꽤 많이 소비해왔다. 나의 부모님은 대체로 검소한 분들이지만 안경과 구두만큼은 가능한 최고급으로 맞춰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셨다. (최근에는 탈모방지 제품과 건강식품에 대해서도..;;) 우리집 네 가족은 모두 시력이 좋지 않아서 일가족의 안경값을 합하면 아버지의 한달 수입에 근접했을 정도였다. (나도 이런 성향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처음 받은 원고료로 질러버린 물건이 안경이었다.)

그러다 라식수술을 받았다. 제법 고가의 수술비를 투자했지만 시력교정용구에 써온 돈을 생각하면 망설일 일이 아니었다. 수술 후, 또렷한 시야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았다. 침대에 누워서 책을 보다가 그냥 잠들어도, 콘택트렌즈가 각막에 달라붙어 뻑뻑해지거나, 콧잔등에 안경 눌린 자국이 생기거나, 심지어는 안경다리나 렌즈를 부러뜨려먹는 등등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력이 다시 저하되기 시작했다. 근시는 각막이 두꺼워진 거라는데, 그 두꺼워진 부분을 레이저로 태워버린 수술의 화상자국이 다시 아물어드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시력을 악화시키는 독서습관이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냥 수술이 실패한 것이거나 일반적인 부작용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병원에서는 재수술을 권했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아서 다시 안경을 구입한 것이 이년 전의 일이다.

평상시엔 안경을 착용하지 않지만 활자가 작은 책을 읽을 때는 찾아들게 된다. 사실 요즘 나오는 책을 읽을 때는 안경이 없어도 괜찮은데(조도가 적당하다면) 다만 눈이 쉽게 피로해져서 책을 읽는 도중에 찾을 때가 많다. 늘 쓰는 물건이 아니라서 대체 이 안경이 어디있는 건지 찾으려면 집안을 헤집고 다녀야 하는데 그러다 귀찮아지면 그냥 맨눈으로 볼 때도 많다. 그래서 시력이 더 나빠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눈을 부비면서 책을 보다가 덮어놓고 안경을 찾다가 포기하고 문득 시력이 점점 나빠져서 결국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된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오래된 공포, 이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어렸을적에는, 시력이 좋고 목소리도 좋아서 책을 잘 읽어주는 남자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시력도 책을 읽어주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흑. 주변에 책을 소리내어 읽기를 좋아하는 친구도 없다. 흑흑. 돈을 많이 벌어서 책 읽어줄 사람을 고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까? 흑흑흑.

+ 맹인이나 시력이 나쁜 노인들을 위해서 책을 읽어주는 활동을 하는 단체가, 우리나라 어딘가에는 있을 것 같다. 조금 불편하지만 아직 책을 읽을 수 있을 때 봉사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by 작나무 | 2009/11/04 15:08 | 일상잡설 | 트랙백(1) | 덧글(7)
트랙백 주소 : http://treeart.egloos.com/tb/4269175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Tracked from 예민소굴 at 2009/11/05 02:14

제목 : 세상은 다정해지기 위해 진보한다.
책 읽어주는 사람. - 작나무님 댁에서 트랙백. 일전에 슈퍼스타K에 출연해 일약 유명해진 시각장애인 김국환씨를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인터넷상의 사람들의 반응에 기쁘기도 했지만 그만큼 달리는 악플에 상처받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기사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시각장애인이라며, 어떻게 악플을 '봤다'는 거지?' 흔히들 시각장애인이 글을 보는 방법이라면 타인이 읽어주는 것을 듣거나 혹은 점......more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11/04 15:10
녹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곳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봉사는 특별한 자격조건이나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발음만 정확하다면 간단한 교육을 받은 후에 곧바로 활동할 수 있다. 보통 주1회 정해진 시간에 스튜디오로 찾아가 한두 시간 녹음에 참여한다. 상시 모집을 하지만 모집기간을 따로 두는 곳도 있으니 문의 후 방문하는 것이 좋다.

한국점자도서관 서울시 강동구 암사2동 02-3426-7411
대한적십자봉사관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02-951-0468
인천시각장애인복지관 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032-876-3500
광주점자도서관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062-672-9535
부산점자도서관 부산광역시 사상구 덕포2동 051-302-9010

[출처] 책 읽어주는 봉사|작성자 warmcharisma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11/04 15:11
아이들을 위해 책 읽어주는 봉사활동은 많은 것 같다.
http://www.i-friend.org/ - 1318 북센터 활동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11/04 15:19
http://cafe.naver.com/heeplovebook.cafe
- 우진학교에서 책읽어주는 봉사모임.. 아직 시작단계인 듯.
그런데 주말에는 좀 어려울 것 같은데;;; ㅠㅠ
Commented by 暗雲姬 at 2009/11/04 18:50
나는 평생 어마어마하게 눈이 좋았는데요, 노안이 동무들보다 늦게 와서 그것도 행운이라고 으쓱거렸는데요, 이제 돋보기 써요.
그런데 돋보기 쓰면서 눈 나빠졌어요.
돋보기로 책 읽다 고개 들고 아차 하면서 다른 데 보고 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그렇다네요.
그렇다고 다초점 렌즈는, 맞추기는 했는데 내게는 영 아니올시다 예요.
평소에 안경 쓰는 일 없는 사람이 다초점 렌즈를 쓰면, 책 읽을 때 각도가 꼭 정해져 있어서 불편하기 짝이 없고...

음, 동무들 중 지독한 근시들은 노안이 오니까 살짝 좋아지는 것처럼 전보다 잘 보인다고 합디다만.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11/06 00:57
돋보기를 일상적으로 쓰면 시력이 나빠지는 거로군요.

그래도... 근시가 심하면 원시가 되는 과정에서 약간 나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는 희망적이에요. ㅋ 어쩐지 노년이 행복하게 시작될 것 같은...;;;
Commented at 2009/11/06 01:5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작나무 at 2009/11/06 02:56
저는 내일 가볼거에요. 갔다와서 후기쓸게요. ^^;

:         :

:

비공개 덧글